냉전의 종언을 이끌었던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사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전 세계 평화를 위협했던 동서 냉전을 끝낸 ‘영웅’이었지만,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몰락한 동구 공산권을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란 혹평을 받는 등 역사적 격변의 중심에서 영욕의 삶을 살았다.

러시아 타스·스푸트니크 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54세 때인 1985년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됨으로써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사회주의 혁명에 이어 ‘제2의 혁명’으로 불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며 소련과 국제사회에 대변혁을 몰고 왔다.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 완전히 다른 통치 스타일을 보였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매력적이고 지적인 외모를 무기로 TV를 통한 대국민 연설에 적극 나섰다. 부인 라이사 여사 역시 대중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수십 년간 이어온 양국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어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 한편,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명을 일방적으로 감축하는 등 굵직한 군축 드라이브에 속도를 높였다.

결국 1989년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데 이어 1990년 동·서독 통일을 수락하며 동구권 민주화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0년 한·소 수교를 추진한 주인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준비되지 않은 급진적 개혁이 결과적으로 경제적 혼란과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냉전 말기 경제 침체에 체르노빌 사태까지 겹친 상황에서 섣불리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물가 급등과 마이너스 성장이란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1989년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그의 권력은 1990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세를 보였다. 1991년 8월엔 보수파의 ‘3일 천하’ 쿠데타로 정치적으론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결국 발트 3국(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과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용인했고, 뒤이어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은 사망선고를 받아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도 1991년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난 뒤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 학술과 강연 활동에 전념해왔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에 세계 각국 지도자들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신뢰받고 존경받은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냉전을 끝내고 철의 장막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유로운 유럽을 위한 길을 열었다”고 말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냉전의 평화적 종식을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일을 했다면서 애도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트위터에서 “냉전을 평화로운 결말로 이끈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보여준 용기와 진실함에 항상 감탄했다”고 애도했다.

껄끄러운 관계였던 푸틴 대통령도 ‘깊은 애도’를 표명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전문을 보낼 것”이라고 전했다.

신동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