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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례비조차 없었던 청백리의 상징 박수량...명종, 청백당·비문없는 백비 ‘소탈함 기려’ [남도종가의 재발견]
장성 밀양박씨
박수량 청렴 상징하는 글자 없는 흰 비석, 백비.

아곡 박수량(1491~1554)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청백리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명종조 조정은 박수량 묘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백비’를 두도록 했다. ‘박수량의 청렴을 알면서 비에 새기는 것은 오히려 잘못 알려질 수 있다’면서 비문 없이 그대로 세웠다는 것이다.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절후가 순조롭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쉬운데 임신부는 더욱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약제를 내려 보내어 백성의 목숨을 널리 구제하게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린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애민 목민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남도일보 보도와 전남종가회에 따르면, 박수량은 문과 급제하고 중앙관으로는 예조좌랑, 동부승지, 공조·호조·예조 참판, 한성부판윤, 형조·호조 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고, 지방관으로는 충청도사, 고부군수, 보성군수, 나주목사, 함경도관찰사, 담양부사,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지극한 효성의 본보기를 몸소 보였고, 흉년 대책을 세우고 전염병 팬데믹이 나지 않도록 의약품을 확보하는 등 애민을 실천했다.

30여년 관리 생활을 마감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한양에 집 한 채도 없었고 자손들이 장례 치를 비용이 없다는 사실을 안 명종은 청렴 소탈한 덕을 칭송하며, 장례 제수와 호송인력을 제공했다. 나라에서 청렴을 기리는 청백당을 지어주었다.

청백당은 정유재란에 불타고 장성군이 수년전 청백한옥체험관으로 복원했으며, 청렴교육을 위해 백비를 찾는 공직자들의 연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8세 박태양(1731~?)은 장성 황룡면 홍길동 얘기의 진원지로 알려진 아곡리 아치실에 종가를 열었다. 박태양은 행의청심(行義淸心, 마음을 맑게 가지고 바른길을 취하여 행하라)이라는 가훈을 남겼다. 장성군이 운영하는 청백당에 비해 종택은 매우 왜소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밀양박씨는 고려말 박거인이 정쟁에 밀려 인의현(태인)에 유배되면서 호남과 연을 맺었다. 박연생은 조선 단종조 충무시위사 대호군을 역임했으나 수양대군의 왕권 탈취를 개탄하며 담양 월산에 은거, 박거인을 1세로 하는 태인박씨를 열었다. 박수량도 태인박씨로 과거급제했지만, 후손 박규혁 등이 1831년 밀양박씨 돈재공파로 복관 승인을 받았다. 일부 후손은 지금도 태인박씨라고 자칭한다.

함영훈 기자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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