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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새 대북정책, 제재냐 관여냐…그것이 문제로다-③ [한반도 갬빗]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조 바이든 미국 신행정부가 대대적인 대북정책 검토에 들어갔다. 추가 제재에서부터 적극적인 관여정책 모두 검토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대북정책들이 보여준 SWOT(강점·약점·기회·위협요인)를 따져보자.

오로지 압박만이 옵션…‘네오콘 부시’ 모든 판을 깨다

“존 볼턴은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인 〈그것이 일어난 방〉이 공개되자 문재인 정부 출신 인사들은 이같이 말했다.

그러나 볼턴 전 보좌관은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이끈 주역이 아니다. 당시 그는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주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미 제네바 합의 파기를 유도한 세력의 일원이자 후예다.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단순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이다. 미 공화당 내부에서도 미국 우월주의와 정통기독교주의의 최전선을 뜻하는 시각이자 세력.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은 현실주의가 아닌 선악의 개념으로 대외정책을 펼쳤다. 부시 대통령을 시작으로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부장관 등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부터 이른바 ‘악의 축’ 발언을 주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 북한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부시 행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네오콘이 장악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국방부, 재무부의 입김이 심했다는 점이다. 당시 대북관여정책을 추구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역내 동맹관계를 깨면서까지 대북압박 정책을 고수하는 건 미국의 지정학적 국익에 맞지 않았다. 윤영관 당시 외교장관과 노무현 대통령은 적대관계 속에서도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역대 미국 정부를 예로 들며 부시 행정부를 설득했다.

6자 회담이 진행됐을 때도 조지 W.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반복해 대화 분위기를 흔들었다. 당시 ‘네오콘’들은 대북압박책을 펼치고 싶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했다.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다행히 부시 행정부의 역대 국무장관들은 모두 협상파였다. 콜린 파월·곤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들은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외교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덕분에 ‘최고의 대북협상가’라 꼽히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겸 북핵수석대표가 6자회담을 성사시키고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9·19 공동성명을 체결 직후 깨져버렸다. 북한이 미 재무부의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에 반발해 강경기조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BDA 금융제재는 미국 재무부가 북한이 금융거래를 하는 중국의 마카오 소재 금융기관 BDA에 북한의 위조 달러 유통 및 밀매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금융제재를 가한 사건이다.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는 한가운데 찬물을 끼얹은 이 조치를 주도한 인물은 다름아닌 스튜어트 레비 재무차관. 대표적 ‘네오콘’이다.

김대중-클린턴, ‘대북정책 정박’이 이끈 성과…北경직성은 한계

도널드 트럼프-버락 오바마-조지 W. 부시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공통적 배경에는 ‘한미 정책기조의 불일치’가 있었다. 미국의 민주당 정부와 국내 민주당 정부가, 혹은 미국의 공화당 정부와 국내 보수당 정부와 일관된 대북정책을 이끈 시기는 지난 1993년 이후 4년 정도에 불과하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대북정책은 한국과 ‘정박’으로 움직여 위기를 화해의 기회로 만든 사례로 꼽힌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한반도 전쟁 위기를 넘긴 클린턴 행정부는 관여·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북핵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YS정부는 대북관여에 소극적이었지만 미국의 관여정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북미대화는 1996년 양자 미사일 실무회담과 4자 회담으로 이어졌다.

[헤럴드DB]

이후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관여정책과 맞물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 그 유명한 ‘페리 프로세스’에 합의했다. 페리 프로세스는 1999년 북미가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개선을 위해 합의한 포괄적이고 단계적인 해결방안이다. 1999년 10월 타결된 페리 프로세스는 이듬해인 2000년 북미 ‘공동 코뮤니케’로 내용을 구체화했다.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북미 연락사무소 개소, 북한 비핵화 절차 등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의 의견을 전달했고, 북미 정상회담 추진의지를 내비쳤다. 그 사이 김대중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공단 사업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결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고서야 이뤄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당시 북한에 억류 돼 있는 미국 여기자 2명의 석방을 교섭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북미간 포용적·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북미 실무대화의 기회를 마련했다. 그러나 북미 대화는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문제는 북미대화 기조 속 남북관계 개선으로 한반도 정국은 안정적으로 관리됐으나,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의 실질적인 불능화 조치는 지지부진했다는 점이다. 북미 실무회담에서 군사·안보 분야 협상이 정체되면서 미국 조야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더구나 세부사항을 두고 북미 간 의견조율이 이뤄지지 못해 협상은 장기교착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비판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사실 클린턴 대통령은 퇴임을 하더라도 북한을 방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 여론은 IAEA 특별사찰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에 미국 정상이 대화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방문 계획을 취소했고,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면서 북미 대화의 성과는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나버렸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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