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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T과학칼럼] 기술확산, 나무에서 배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나뭇잎이 사라지고 앙상한 나무들이 길가에 장승처럼 줄지어 서 있다. 여린 잎새들이 파릇파릇 봄소식을 전해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쌀쌀해진 날씨로 그 짙었던 잎새는 누렇게 변해 어느새 낙엽으로 길바닥을 가득 메운다. 그나마 나뭇가지에 작은 결실이나마 달려 있어 그 허전함을 메워주고 있다.

살아 있는 생물 중 유독 나무만 평생 한 곳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 그러면서도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게 바로 나무의 세상을 위한 ‘역할과 책임(R&R·Role & Responsibility)’이다.

생물마다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전략이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 숱한 위험과 난관을 잘 극복해냈고, 오랜 세월 생명과 자손을 잘 지켜왔다. 특히 나무는 인간이 배워야 할 특별한 생존 전략을 갖고 있다. 1980년부터 2015년까지 35년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 동북부 지역에 군락을 이루던 스칼릿오크나무가 물을 찾아서 북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땅의 습기가 조금이라도 더 풍부한 쪽으로 그 뿌리가 뻗어나갔고, 그 방향으로 떨어진 씨들이 더욱 잘 자랐을 테니 결국 35년 동안 군락 전체가 이동한 셈이다.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열매’라는 도구를 잘 활용해왔다. 또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기에 이동이 빠른 동물들을 이용했었다. 동물이 절실하게 원하는 달콤한 열매를 먹이로 제공했던 것이다. 바로 맛있는 과육으로 위장한 열매를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열매 속에 딱딱한 껍질을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꼭꼭 숨겨뒀다. 동물이 그저 맛있는 과육만 배불리 먹게 하고, 딱딱한 속껍질은 못 먹는 것이라 여기게 해 또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버리게 했다. 저 멀리 퍼져나가는 자신의 씨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년에는 더 맛있는 열매를 만들 계획을 나무는 해마다 세워왔다. 맛없는 열매로는 나무가 더는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부 출연연구소들은 오랜 기간 연구에 힘써왔다. 초기 아주 달콤한 기술을 개발해 기업들에 많이도 넘겨줬다. 초기엔 개발기술의 인기도 높았고, 또 잘 퍼져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업들이 바라는 기술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출연연들이 그 욕구를 다 충족해주기 어려운 상황이 잦아졌다. 기술에 고픈 배를 움켜쥔 채 기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배를 채워나갔다. 뒤늦게 개발된 연구소의 기술들은 창고에 쌓여갔다. 창고에는 아직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갇혀 있는 기술이 많다. 이러한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며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사라지고, 결국 각자의 길로 한참을 가 버렸다.

쉼 없이 가동되고 있는 출연연구소들은 이제 나무의 전략을 통해 역할과 책임을 재정립하고 그 전략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꽃과 열매를 이용해 벌·나비와 동물을 유혹하듯 연구소도 기술의 모양이나 색깔을 잘 엮어내 기업들을 유혹할 필요가 있다. 동물들이 맛있는 열매를 먹고 그 씨를 널리 퍼뜨리듯 기업들은 출연연의 달콤한 기술을 넘겨받아 만든 제품을 전 세계로 널리 전파해야 할 것이다. 기업들의 입맛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니 어떻게 변할지조차 수시로 살펴야 한다. 그에 맞는 열매의 맛과 형태까지도 즉각 바꿔야 한다. 이러한 신속한 선순환 속에 개발된 기술들이야말로 깊숙하게 기업들 속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출연연 모두가 나무에서 배워야 할 기술 확산의 전략이다.

최규하 한국전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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