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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인생은 실패했어”…그래도 희망은 있다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만3799명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36명, 10∼30대 사망원인 1위, OECD국가 1위다. 단절과 고통, 불안, 무의미가 팽배해 있다는 얘기다.

풍요의 시대에도 우울과 외로움은 커가고 자유의 확대에도 주인처럼 살지 못하며,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 대한 기대를 잃고, 공포와 증오는 커지는 시대에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세계적인 석학 시어도어 젤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어크로스)는 출간된지 26년이 지났지만 갈등과 불신의 시대인 현재 더 시의적절해보인다.

젤딘은 전쟁이나 유물, 연대기 중심의 거대 서사 대신 우울, 불안, 갈등 등 인류와 함께해온 내면을 속박하는 또 다른 역사에 주목하는데, 이를 가정부, 순경, 농부, 간호사, 의사, 실업자 등 다양한 개인들의 얘기에서 시작한다.

책의 맨 앞에 등장하는 인물은 “내 인생은 실패했어요”라고 말하는 쉰한 살의 쥘리에트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정부였고, 그녀도 열여섯 살 때부터 가정부 일을 해왔다. 남편의 폭력과 아이들을 건사하지 못해 양부모에게 위탁되는 경험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는 혼자서 하는 가정부 일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상대방의 말에 쉽게 상처받는, 자존감이 낮은 그녀는 의미있는 일을 통해 자신을 회복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성장한 딸 역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저자는 쥘리에트의 불행 이면에서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거나 그렇게 취급돼온 모든 사람들을 본다.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제도 속 노예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스스로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데 주목한다. 저자는 자유는 단지 법으로 보호되는 신성한 권리의 문제만은 아니라며, 자신이 주인되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타인과의 유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계심이나 자존심을 넘어 새로운 만남을 통해 영감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젤딘은 인류의 역사를 투쟁으로 보는 대신 여성과 남성, 신자와 비신자, 계층과 인종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애썼던 노력들에 주목한다. 낯선 이에 대한 적대감 대신 관용과 이해의 역사다.

가령 도교 사원은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온갖 신을 모셔놓고 대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였으며, 이슬람교는 흔히 단층적이고 단일체로 인식하는 것과 달리 기독교 등 다른 종교와 많은 역사를 공유했다.

저자의 흥미로운 탐색 중 하나는 화성 남자, 금성 여자의 얘기다. 프랑스 코냑 지역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여성들은 남자들이 관심사도 다르고 대화가 안된다고 여긴다. 젤딘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풀어간다. 말다툼을 대화로 바꾼 소크라테스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뭔가를 두 사람이 모이면 서로 질문을 하고 편견을 살피고 분석하고, 공격하거나 모욕을 주지 않고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살롱도 새로운 대화의 모델로 제시된다.

그러나 대화하고 싶은 욕망만으로 진정한 대화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것. 수사나 논쟁, 남들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데 따른 절망과 같은 것들이 대화의 적이다. 젤딘은 “사람들이 대화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서로 동등해질 수 있다”는 통찰로 나아간다.

또한 “인류의 놀라운 성취는 이질적인 사상과 문화의 만남에서 비롯됐다”며, 그는 타인에 대한 증오와 냉소에서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주변의 소소한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역사의 시공속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문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인간의 내밀한 역사/시어도어 젤딘 지음,김태우 옮김/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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