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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가 살찌운 ‘트럼프의 큰정부’[글로벌 플러스]
2016년 대통령 당선부터 큰정부 추구
코로나19로 대규모 부양책 속전속결 진행
한번 커진 정부, 위기 끝나도 곧장 줄지않는 ‘톱니효과’
진보도 보수도 속내는 ‘못마땅한 포퓰리즘’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는 중간중간 공격을 받긴 했지만 규제완화와 시장자율 확대 그리고 작은정부라는 믿음을 미국인에게 굳건히 심어놓았다. 민주당 소속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조차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단 몇 달 사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기업들은 정부 지원에 생존이 걸렸다고 읍소하고 있다. 미국 시민들은 어서 빨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지원금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람 이매뉴얼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적이라고 했던 레이건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트럼프가 지핀 큰 정부의 불씨, 코로나19가 부채질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할 때 외친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다. 더군다나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를 ‘관세맨(tariff man)’이라고 부르며 중국은 물론 동맹인 캐나다에까지 새 무역협정 테이블에 앉혔다. 기업인 출신으로, 보수 공화당 소속인 대통령이 나라를 전면에 내세우고 관세의 칼을 휘두른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는 그 변화에 정당성과 열렬한 지지를 가져다줬다. 현재 미국 정부와 의회가 승인한 코로나19 관련 경기부양책 규모는 2조7000억달러(약 3280조원)에 달한다. 추가 부양책이 활발히 논의되는 걸 감안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순지출이 2009~2010년 금융위기 당시의 25%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커진 정부 지출은 위기가 끝나더라도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톱니 효과(ratchet effect)’라고 설명한다.

실제 미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방정부 지출 비율은 2001년 9·11테러와 2008년 금융위기로 급격히 높아진 뒤 2001년 이전 수준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더 뚜렷해질 가능성이 높다. 섣불리 재정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재정건전화에 나섰다가는 자칫 성장 동력을 약화시켜 경기 침체를 더 오래, 더 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출을 줄이기보다는 GDP를 높이는 쪽에 초점을 맞춘 정부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정부지출 확대의 정당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당선 이후 공언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2016년과 달리 지금은 원자재 가격이 싸고 금리도 낮다. 높은 실업률로 노동력도 넘쳐난다.

적극적인 정부 역할에 대한 지지가 굳건한 것도 큰 정부에 힘을 싣는 중요한 요인이다. 정부의 경제 부문 역할 확대에 대해 미국인의 63%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53%보다 높다.

정부가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으며 재정적자가 걱정된다는 비율은 2008~2009년 평균 59%에 달했지만, 지난 4월 조사에서 같은 우려를 표명한 비율은 44%로 낮아졌다. 오히려 정부가 너무 지출을 적게해 경제 문제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걱정된다는 응답 비율이 41%로, 10년 전(33%)보다 높아졌다.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 헨리 올슨은 지난 3월 ‘큰 정부가 진짜 인기를 끌려 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많은 진보 자유주의자들조차 위기가 지나가면 정부 권력이 감소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공적인 정부 대응 이후 같은 것을 더 원한다”고 지적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대공황을 해결한 이후에 그랬고, 스태그플레이션과 싸운 레이건 전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성공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세계 시장경제에 더 많은 공적개입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견제 대신 협조로 속전속결

정부의 영향력은 자연스레 정치와도 연결된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반대표를 던질 의원은 없었다. 소수의 전통적인 보수 정치인이 큰 정부에 반론을 제기했지만 메아리는 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공화당 소속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6500억달러 규모의 중소기업청(SBA) 급여 보호 대출 프로그램(PPP)를 적극 옹호한 대표적 인물이다. 심지어 역시 공화당 소속인 조시 홀리 상원의원은 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기업의 급여 비용 80%를 부담해야 한다는 법안을 내놓기도 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살아서 이 광경을 봤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노릇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9000억달러 경기부양책을 통과시킬 때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은 모두 반대를, 상원에서는 단 세 명만 찬성표를 던졌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그 중 한 표는 곧 민주당에 입당한 알렌 스펙터 의원의 표였다. 폴리티코는 한 때 보수주의로 정의됐던 경제자유주의자들은 2020년에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관계에서 ‘독립성’을 강조해온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중앙은행의 정의를 새로 쓰고 있다.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뽐냈던 존재감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 투기등급(정크본드)까지 매입하겠다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찍어낼 막대한 국채를 상당 부분 떠안아야 하는 것도 연준이다.

공화당 출신의 더글러스 홀츠 에킨 전 의회예산국(CBO) 국장은 “연준이 돈을 뿌리는데 더 능숙하기 때문에 재무부가 연준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더군다나 코로나19가 불러온 새로운 유형의 안보 위기는 정부 정책에 토를 달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외교, 군사적 위협과 동일시됐던 안보는 코로나19를 맞아 경제적 자립, 핵심 산업 보호, 보건의료 능력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 됐다.

수 고든 전 미 국가정보국 부국장은 CNBC방송에 “현재의 코로나19 팬데믹은 국가 안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보와 보수 모두 못마땅한 트럼프의 큰 정부

전통적으로 큰 정부란 시장에 적극 개입해 불평등을 해소하고 자원 배분에 능동적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에 ‘민주적 사회주의’ 길의 가능성을 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그 최전선에 있다.

그는 “팬데믹은 현재의 기업 경영 시스템이 가진 단점을 더 잘 보여준다”고 일갈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발생한 의료 혼란, 마스크 하나 구할 수 없는 대형마트,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허술한 보건 지원 등 미국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로나19 이후 진보주의자들이 주창해온 큰 정부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주정부의 봉쇄조치(셧다운)에 항의하며 길거리에 나선 시위대는 그 가능성이 크지 않을 것을 방증한다. 이동제한 조치가 풀리자마자 플로리다 해변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입에서 공적 의료보험 시스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전통 보수주의 입장에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키운 큰 정부가 달갑진 않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정치 철학이나 가치가 아닌 눈앞의 인기를 먹고 덩치를 키우는 포퓰리스트라고 공격한다.

미 상공회의소의 수석 정치전략가인 스콧 리드는 보수 공화당이 큰 정부를 언제까지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정부의 크기는 재계에 정치를 점점 더 중요하게 만든다”면서 “중도 우파인 공화당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되돌리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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