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업 현금고갈에 직원 급여도 못줘
정유업 수요 감소에 제품 재고 골머리
1분기 버티던 가전도 2분기 위기 고조
“지금은 손익이 중요한 시기가 아닙니다. 현금이 돌지 않으면 탄탄했던 기업도 한순간에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대유행 속에 기업들이 초유의 현금난을 겪고 있다. 만들어 놓은 상품들은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이고, 현금은 상상을 뛰어넘을 속도로 메말라지고 있다. 정유업계는 정제해 놓은 석유제품을 쌓아 놓을 공간조차 없어 정부에 SOS를 쳤다. 항공사는 급여를 줄 돈조차 떨어지자 무급휴직에 이어 인력 구조조정까지 들어갔다. 북미와 유럽 등의 대형 유통 매장의 셧다운으로 가전업계도 2분기 재고 급증 우려에 처했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상장사 68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4분기 기준 국내 상장사들의 현금성 자산은 1년 사이 10조원이 줄었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19가 반영되기 전의 수치다. 지난 1분기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감소치는 이를 상회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익을 내고도 기업이 도산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악몽이 기업들에 드리우고 있다.
▶급여 줄 돈도 없다…내일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항공업=코로나19로 인해 비행기가 멈춰 선 항공업계는 현금 곳간이 아예 비어버렸다. 최후의 보루인 급여조차 주지 못해 무급휴직과 권고사직 등 자구책이 쏟아지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절반 이상의 직원이 무급휴직에 들어갔으며, 이스타항공은 1개월 휴업에 들어간 데 이어 직원 절반을 구조조정하는 방안까지 추진하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운항 중단이 2~3개월 이어질 경우 글로벌 항공사의 75%가 유동성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들은 대부분 2분기 중 현금성 자산이 소진될 것으로 관측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간신히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으로 버텨내고 있다. LCC들은 정부의 자금 지원에 기대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태지만 미봉책이다. 우기홍 대한항공 사장은 “지금 아무리 돈 많은 항공사도 6개월 서 있으면 돈이 안 돌아간다”며 “지금은 한 달에만 6000억원의 여객 수입이 없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땅에 묻을 수도 없고…넘쳐나는 석유제품 재고=재고 급증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정유업계가 꼽힌다. 정유 4사는 쌓여가는 재고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석유제품 판매가 크게 둔화됐지만 산유국들과의 장기계약 탓에 원유는 계속 들여오고 있어 저장공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해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재고자산은 지난해 말 16조15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정유업계의 불황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2014년 12조6000억원을 기록한 이후 내림세를 보이며 한때 8조원대까지 떨어졌지만 다시 급증하는 추세다. 이 추세는 1분기 역대 최고 수준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전 세계 차량 운행이 줄고 항공 노선이 대폭 축소되면서 경유와 항공유 판매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잉여 항공유를 급하게 덤핑 가격으로 처리하며 버텨 왔지만 이달부터는 재고로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다. 정유업계는 2분기 이후를 걱정한다. 물동량 감소에 이어 산업 활동 또한 감소 추세로 들어서고 있어 수요 감소는 2분기에도 지속될 것이 분명하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위기 지역이 아시아로 국한됐던 IMF 외환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전 세계적인 동반 수요 감소에 굴지의 정유사들도 현금을 걱정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가전업계 2분기부터 재고 급증 우려…철강업계도 너도나도 자금조달=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재무 상황이 안정적인 가전업계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전업계는 생산중단과 수요감소 모두를 걱정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국내외 생산거점 37개 중 4분의 1이 멈췄다. LG전자도 러시아 가전공장, 브라질 마나우스 TV·에어컨 공장, 미국 테네시 세탁기 공장 등의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오프라인 판매 비중이 높은 북미와 유럽 시장의 수요 감소도 2분기에 두드러질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의 글로벌 TV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TV 출하량은 2억350만대로 지난해의 2억2291만대보다 8.7%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올해 초에 제시한 전망치 2억2548만대에서 9.7% 하향 조정됐다.
수요 위축으로 철강업계도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글로벌 제조업체의 잇따른 가동 중단과 시황 침체가 직격탄이 되자 부랴부랴 현금 조달에 나서고 있다. 현대제철은 최근 5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데 이어 200억원의 기업어음(CP)으로 자금을 확보했다. 포스코는 15억달러 규모의 외화채를 발행했다.
임채운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만들어놓은 상품의 판매가 돼야 매출이 이뤄지고 현금이 들어오는데 지금은 판매 자체가 안되는 상황”이라며 “기업 유동성 문제가 장기화하면 IMF 외환위기 때처럼 대기업들도 장부상으로는 이익을 내면서 부도가 나는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산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