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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공정위 지침에 애꿎은 국내 패션업계 ‘철퇴’

우려가 현실이 됐다. 국내 백화점들이 내달 2일부터 신년 세일을 시작하지만, 예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 면에서 매우 쪼그라들었다. 세일 품목도 백화점이 직매입하는 일부 명품 브랜드나 시즌 오프 상품 정도다. 이제는 평소 눈여겨 봤던 국내 패션 브랜드나 리빙 제품, 잡화 등을 기존보다 싼 값에 사는, 이른바 ‘득템’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들이 세일에 소극적인 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년부터 시행하는 ‘대규모 유통업 분야의 특약매입 거래에 관한 부당성 심사지침 개정안’(이하 특약매입 지침) 때문이다. 일명 ‘세일 지침’이라고 불리는 이 규정의 핵심은 백화점이 가격 할인 행사를 진행할 때 최소 50%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서는 백화점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에 ‘가격 할인분’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백화점 입점 업체가 20만원 짜리 지갑을 40% 할인한 12만원에 판매한다면, 할인 금액 8만원의 50%인 4만원을 백화점이 부담해야 한다. 예전에는 백화점이 정기 세일을 할 때 행사 프로모션 비용이나 사은품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면, 이제는 입점 업체가 할인한 가격의 절반도 백화점이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정위 지침대로라면 백화점들은 세일을 통해 수익을 확대하기 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백화점협회가 주요 5개 백화점들이 공정위 지침을 적용해 세일하는 시뮬레이션을 적용해 본 결과, 이들 업체의 연간 영업이익은 25%나 줄었다. 하지만 세일을 하지 않으면 이익 감소폭은 7%에 그쳤다. 백화점들이 신년 세일을 준비하면서 세일 기간을 공고만 할 뿐 참여 독려를 하지 않은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공정위 지침이 유지되면, 사실 백화점 입장에선 세일을 안하면 그 뿐이다. 이미 백화점 업계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만큼 25%의 수익 감소를 감내하면서까지 세일을 통해 볼륨을 확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근 백화점 내부적으로 해외 명품을 위주로 브랜드 라인업을 재편하고 있는 만큼 세일이 백화점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갈 수록 줄어들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해외 명품들은 세일을 하지 않거나 연중 세일 계획을 본사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백화점의 정기 세일과 거리가 있는 탓이다.

문제는 공정위의 지침이 애먼 국내 패션업계에 튈 수 있다는 점이다. 백화점이 정기 세일과 같은 판촉 행사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되면 패션 업계에선 사실상 재고를 소진할 기회가 없어진다. 백화점 정기 세일이나 ‘00 기획전’ 형식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싶어도 백화점이 행사의 ‘자발성’과 ‘차별성’을 강조하다보면 기획 단계에서 좌초될 가능성이 커서다.

백화점이 행사의 자발성과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공정위가 백화점이 가격 할인분 등 행사 비용을 부담하지 않은 요건으로 이 두 가지를 강조해서다. 하지만 공정위가 제시하는 자발성 요건 기준이 모호해 입증하기 어렵다 보니 세일을 해서 공정위의 레이터 망에 걸리기 보다 판촉 행사를 하지 않는 쪽으로 백화점들이 몸을 사릴 가능성이 크다. 재고를 털고 싶어도 백화점 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재고 정리의 어려움으로 이들이 백화점에서 짐을 쌀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실 국내 패션업계는 백화점의 입점으로 빠른 시간에 시장에 정착할 수 있었다. 백화점에 입점만 하면 백화점의 브랜드 파워 덕에 초기 런칭 비용을 줄이고, 백화점의 집객력을 활용해 매출 확대가 쉬웠기 때문이다. 또 한 백화점에 입점하면 그 백화점의 전국 매장에 입점할 수 있어 단시간 내 다점포를 운영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상품을 백화점이 외상 매입 형식으로 들여오긴 하지만 가격이나 물량은 입점 업체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 브랜드 전략을 운영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국내 패션업계는 공정위의 지침으로 이같이 강력한 판매 채널의 이점까지 누릴 수 없게 됐다. 안그래도 패션업계는 경기 불황에 온라인몰의 공습, 노(No) 재팬 움직임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데, 정부 정책으로 시련이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현실을 간과한 탁상공론 정책은 그 부작용이 어디까지 전염될지 모른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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