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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희의 현장에서] 조국이 가야할 길

지난 8월 20일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 후보자 딸 장학금 논란이 한창일 때 양산 소재 부산대 의전원을 찾았다. 조국 모친이 기증한 그림을 찾겠다고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휴게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쇼파 옆에는 수험서가 놓여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은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차마 학생들에게 “이곳에 조 후보자의 모친이 그린 그림이 걸려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조 후보자 딸이 유급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후보자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문 대통령은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검찰 수사가 진행중이란 사실을 ‘명백한 위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이번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를 낮춰잡은 발언이다.

김다민 서울대 부총학생회장은 지난 9일 3차 촛불집회에서 “오늘 대한민국의 정의와 공정은 죽었다”며 “지금 대한민국 청년·대학생들은 머리가 커지기 시작할 때부터 공정과 불공정의 차이를 보고 자란 세대다. 검찰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일을 당장 중단하고 책임 있는 모습으로 사퇴해야 한다”고 외쳤다.

서울대·부산대·고려대 학생들만, 또 야당 지지자들만 분노한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도 역시 절망했다. 지난 2일 조 후보자의 대국민 기자회견이 있던 날 강남역에서 만난 50대 남성은 “능력있는 아버지가 못돼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식 잘 키우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한다는 자조 섞인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는 말장난이 됐다. 조 장관은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국민들이 분노하는 건 단순히 남 잘되는 것이 배 아파서가 아니었다. 과정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다.

향후 조 장관 가족들에 대한 의혹 중 하나라도 유죄가 나오면 정권에 큰 부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이 그를 임명한 것은 그만큼 검찰 개혁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문제는 조국 임명이 정권에 만든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다. 네이버와 다음 포털은 ‘문재인탄핵’과 ‘문재인지지’가 나란히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 이를 일부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행동이라고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해결방법은 완전히 달라진다. 문 대통령이 “개혁성이 강한 인사일수록 인사 청문 과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 때, 국민의 분노를 단순히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정치적으로 치부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성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검찰 개혁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망가진 것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조 장관은 2012년 트위터에 “모두가 개천의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며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이라고 했다. 지금은 개천에 사는 누구도 용이 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어진 상황이다. 이번 조 장관의 입시비리, 사모펀드 의혹 등으로 ‘가진 자만이 성공하는 사회’라는 무력감이 심화됐다. 민주주의도 다쳤다. 2년 전, 촛불을 들고 탄핵을 이끌어 내며 국민들은 정치적 효능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정치 혐오감이 다시 번지고 있다.

“죽어라 공부해도 장학금 타기 힘들어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양산 부산대 의전원에서 만난 한 학생이 한 말이다. 그는 삼수 끝에 의대에 들어왔다고 했다. 성형수술만 하는 성형외과 의사가 아니라 다친 사람들 돌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가 꿈에 대해 말할 때 기자는 두려웠다. 이 학생이 이번 사태를 보면서 ‘결국 돈이 가장 중요하구나. 자식을 위해서는 부자 아빠가 돼야한다’고 생각할까봐 걱정했다.

촛불을 든 학생들보다 무서운 건 “그래 봤자 달라질 거 없다”고 자조하는 학생들과 “역시 한국사회는 어떻게든 성공부터 해야 한다”고 다짐할 국민들이다. 다시 문재인 정부가 정의와 공정을 외칠 수 있을까. 이 무력감, 회의감을 어떻게 흔들어 깨울 것인가.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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