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광화문 광장-김준형 의사·칼럼니스트] 세상의 해체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된다.

카뮈는 1913년 프랑스 본토가 아니라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뮈가 태어나고 1년 뒤, 1차 대전에 참가해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문맹에 청각장애인이었다. 너무나도 가난했던 어머니는 카뮈와 카뮈의 형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의 집 하녀로 일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외삼촌은 툭하면 카뮈에게 손찌검을 했다. 카뮈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불우했다.

10살 무렵 카뮈는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을 겪게 된다. 집에 어떤 남자가 침입해서 어머니를 성폭행한 것이다. 어머니는 기절해서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카뮈는 이런 어머니 옆에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보냈다. 후일 카뮈는 그때 당시의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렸고 동시에 삶이 매일 새롭게 시작된다는 환상도 사라졌다. 내가 그 속에 잠겨있다고 느껴지는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존경하는 사람,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더구나 카뮈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러나 카뮈의 어머니는 세상 밑바닥의 약자였고 아이는커녕 자기 자신도 지킬 수 없었다. 성폭행을 당해서 기절해 있는 어머니 옆에서 카뮈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람이 너무 고통스런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 사건 ‘자체’와 사건에 대한 ‘감정’을 분리해 버린다. 고통스런 감정을 무의식의 세계에 밀어 넣어 버리고 머릿속에는 객관적인 사건의 기억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격리(isolation)’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런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말할 때가 있는 것이다.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섬세한 어린 아이의 마음은 격리의 과정을 겪었던 것일까? 이방인의 첫 문장은 어린 시절 죽은 듯이 누워있는 어머니 옆에서의 느낌을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 전과자가 모녀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모녀가 사는 집에 침입해 우선 엄마의 목을 조르고 성폭행을 시도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여덟 살 딸이 잠에서 깨자 딸까지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 모녀는 탈출해서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런데 범인의 태도가 기가 막힌다. 범인은 모녀를 도운 이웃들에게 “합의하면 될 일인데 왜 경찰에 신고하느냐”, “출소하면 신고한 사람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체포 당시에도 “나는 성폭행 미수여서 금방 출소한다”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견 카뮈의 어릴 적 사건과 닮았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이웃들이 모녀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겪은 딸의 심정은 어떨까? 딸은 어머니가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하고 추악한 욕정에 무너질 뻔했던 모습을 보았다. 이 사건이 성폭행의 미수인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을 생각하면 미수가 아니라 기수이다. 이런 사건이 합의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건이란 말인가? 범인의 입장에서는 욕정의 추악한 분출일지 몰라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해체’라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범인에 맞서 모녀를 보호해 준 이웃들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피해 모녀에 대해 정신과 검진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

특히 이 사건을 맡게 될 사법부는 아이 앞에서 어머니를 성폭행하려 한 범인에 관용을 베풀어줄 필요가 있는 지, 전자발찌를 차고도 성폭행을 시도하는 사람이 거리를 돌아다녀도 되는 지 살펴봐야 한다. 아울러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의 기색이 없고 오히려 협박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처분하는 것이 옳을 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 후 현명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