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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 & 스토리] ‘사법 정의’를 넘어…정치에서 더 ‘큰 정의’를 본 추다르크
2년간의 당대표 임기를 마친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듣는 당이 확고한 철학을 갖고 국정과제를 수립, 이를 정부와 공유하는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남편과의 만남, 정계 입문 권유한 DJ와의 인연
사람과의 인연을, 인생의 소중한 연결고리로 삼은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 ‘그의 정치론, 그의 인생론’

“2년간 가족이 내 눈치만 봤죠. 집에서 내 근처에도 안 왔어요. 이제 (당대표를) 내려놨으니 가족에게 시간을 좀 내야겠어요”

2년의 임기를 마친 추미애(59)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계획은 소박했다. ‘추다르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저돌적인 ‘정치인 추미애’의 모습에 익숙했던 탓인지 다소 의외였다.

차기 당대표를 뽑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지난 24일 당대표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법 정의를 생각했던 법학도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까지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봤다.

▶사람과의 인연, 그것이 인생의 기회=흔히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를 갖는다고 한다. 혹자는 기회를 제대로 움켜잡기도 하고, 혹자는 그것이 기회인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추 전 대표가 첫 번째로 꼽는 인연은 남편 서성환(62) 변호사다. 유신 체제에서 대학을 다닌 추 전 대표는 “지금 분위기와는 다르게 법학과 여학생이 정말 드물었을 때다. 공대처럼 남성들에게 둘러싸여서 남성에 대한 신비감이 없었다”면서 “그런데 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수업 시간에 굉장히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교수를 당황시키고 혼나기도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평생 동지 남편, 정치인 인생에 힘 실어줘

추 전 대표는 “정치적으로 우리는 불행한 시대의 대학 시절이었고, 정치관보다는 법학도로 예리하고 건전한 상식, 이런 것들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누가 먼저 대시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레 7년간의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에 이르렀다.

다음 기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꼽았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지금의 ‘정치인 추미애’가 있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추 전 대표는 “김대중 총재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믿음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분이 정치를 재개해서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김 전 대통령이 1987년 대선에서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1992년 대선에서 다시 패배하고 정계를 떠났다가 복귀를 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추 전 대표를 영입했다.

1995년 당시 현직 판사였던 추 전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각 분야의 인물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현직 판사를 그만두고 정계 입문을 수용하는 것은 웬만한 분들이 모두 말릴 때였다. 요즘처럼 야당이 정치 자금도 차등 없이 분배받던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는 젊을 때니까, 30대니까 무모했다”면서도 “평생 동지인 남편의 조언이 있었다. 용기 있게 도전 해보라고, 자신이 돕겠다 해서 결단하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만류했지만, 이미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에서 활동하고 있던 서 변호사가 유일하게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정치인 추미애의 경력이 시작됐다.

세 번째 기회이자 만남은 좋은 국민을 만나 당대표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2년 전에 당대표로 선출돼 좋은 국민을 만나서 그 뜻을 받들게 된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당대표 맡았던 2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추 전 대표에게 다음 기회를 물었다. 돌아 온 대답은 역시나 정치인다웠다. 그는 “앞으로 기회를 놓고 일부러 기도하거나 욕심내지 않는다. 일부러 뭘 목적하고 그렇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할 수 있는 역할과 소명, 책임이란 단어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이 시대에 마주친 것에 대해서는 실력을 쌓고 지혜를 동원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 ‘사법 정의’ 지키는 길에서 정치를 만났다=법학도로서 판사라는 탄탄대로를 앞에 두고 험난한 정치권으로 뛰어들려면 웬만한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외부의 제안이나 격려가 있더라도 본인이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인생 경로를 바뀌기 쉽지 않다.

추 전 대표는 “사법부에서 사법정의는 멀었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통치자가 법을 통치 도구로 생각한다. 정치적 반대편을 가두는 도구로 법을 활용한다”고 지적했다.

공안재판이나 시국사건 재판에는 당시 정권에 반대할 경우 엄하게 처벌하는 엄정주의가 지배하고, 일정 부분 관용을 베풀면 사법부 내에서 찍어놓고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인사상의 불이익을 줘도 버텨야 했다.

추 전 대표는 “내가 무너지면 그나마 이 땅의 정의가 살아있다고 외치는 일단의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다”며 “사법 정의를 말로만 내세우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불의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이야 민주주의가 이미 왔기에 사법부가 정의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하지만 군사 정권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사법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 이런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기회에 이어 인생의 1/3 이상을 정치인으로 살아 온 추 전 대표에게 ‘위기’를 물었다.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역시 2년간의 대표 임기 동안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삶에 지칠때 삼국지·링컨 전기 읽으며 위안


그는 “힘들어도 보람 있던 시기가 지난 2년이다. 피가 마르고, 전에 가 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누가 일러주지도 않고, 무슨 말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며 “탄핵 시기에 야권의 공조를 얻어야 하면서도 정국을 주도해야 했고, 여론을 청취해서 이를 응집시켜야 했다”고 했다. 대표로서의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인간 추미애로서의 위기는 아직 얘기할 시점이 아니라고 했다. 시기상조라 했다.

대신 삶에 지칠 때 책에서 전환점을 찾는다고 말했다. 인생을 바꾼 거창한 책이 아니라 평상시에 읽었던,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추 전 대표는 “아버지가 아주 어릴 때 삼국지를 사줬는데 왜 삼국지를 읽으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그 속에 나오는 많은 인물과 권력의 상호작용,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2년간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링컨 전기인 ‘팀 오브 라이벌(Team of Rivals)’이라는 책이 힘이 됐다.

그는 “마트에 장 보러 갔다 산 책이었는데, 화가 치밀 때마다 읽어보면 링컨의 번뇌에 위안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사치하는 부인에 대한 고민, 말 안 듣고 배신한 인물에 대한 고뇌 등 당장 주변과 비교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고민을 링컨 역시 했던 것이다.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법안도 책에서 영감을 받는다. 추 대표는 “언론사의 장기연재 기획물인 ‘4ㆍ3은 말한다’는 수십년간 금기시 됐던 4ㆍ3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냈다”며 “제주도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고 도처에 해골이 묻혀 있고, 그때까지 감히 판도라 상자를 열어본 정권이 없었다. 특별법 통과에 공을 들인 이유”라고 말했다.

추 전 대표는 리더로서 정치인의 삶을 사는데 한가지 팁을 던졌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씀하시길, 너무 많이 생각해서 국민보다 서너 걸음 앞서지는 말라고 하셨다. 리더는 국민에 반발짝 정도만 앞서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과 같이 갈 수 있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국민과 같이 호흡해야 하고, 국민과 동떨어질 때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난다는 그의 조언에 ‘천상 정치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형ㆍ홍태화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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