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의 실시간 위치정보를 알려주는 ‘마린트래픽(Marine Traffic)’에 따르면 북한 석탄을 적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치 글로리호’가 20일 오후 제주도 인근 영해를 지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마린트래픽 홈페이지 캡처] |
-문제는 美공공외교 담당매체가 韓을 겨냥해…美내 회의론 반증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북한산 석탄의 국내유입 정황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면서 한국이 '새 대북제재 구멍'이 됐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됐다. 국무부 대변인실에서 “대북제재 결의 회피행위에 관여한 단체(entities)에 대한 독자제재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우리 정부에 우회적인 경고를 날린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왔다.
아태지역 항만국 통제위원회(도쿄 MOU)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스카이 엔젤호가 북한산 석탄을 국내 하역한 정황이 확인됐음에도 불구,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엔 회원국들은 스카이 엔젤호에 대한 검색조치만 취하고 억류조치는 취하지 않았다.선박을 억류할 만한 ‘합리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도쿄 MOU] |
▶北석탄 반입 선박, 억류할 근거 부족했다= 한국이 ‘대북제재의 새 구멍’이 됐다는 주장의 근거는 지난해 10월 북한산 석탄이 국내반입된 정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탄을 하역한 선박들이 억류되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북한산 석탄을 나른 것으로 추정되는 스카이 엔젤호와 리치 글로리호를 억류하지 않은 채 검색만 실시한 나라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아태지역 항만국 통제위원회(도쿄 MOU)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일 일본 정부는 스카이 엔젤호가 홋카이도(北海道) 무로란(室蘭)에 입항했음에도 불구, 억류하지 않은 채 검색만을 실시했다.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따르면 스케이 엔젤호와 리치 글로리호에 북한산 석탄이 선적하게 된 것은 지난해 8~9월 경, 북한에서 석탄을 실은 화물선 4척이 러시아 홀름스크항에 하역했을 때다. 보고서는 “석탄이 허위 원산지 증명서를 이용해 환적됐을 수 있다”며 두 선박에 실린 선박이 러시아산으로 둔갑한 북한산 석탄을 선적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두 선박이 지난해 10월 각각 인천과 포항에서 하역한 석탄이 실제 북한산 석탄일 수 있다는 직접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외교부가 ‘합리적 근거’가 부족해 스카이 엔젤호와 리치 글로리호를 억류하지 못했다고 밝힌 이유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2397호는 석탄ㆍ석유를 수출입한 ‘합리적 근거’가 있는 선박에 대한 검색, 억류, 그리고 나포 조치를 명시하고 있다.
당장 스카이 엔젤호와 리치 글로리호가 하역한 석탄이 러시아산으로 둔갑한 북한산 석탄임을 우리나라 수입업체가 인지하고 유통했다는 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산 석탄의 반입여부를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를 향해 비판적 발언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미국의소리’(VOA)는 ‘독자제재를 주저하지 않겠다’는 국무부 대변인실의 입장문을 공개했으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한국을 겨냥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22일 오히려 한국은 “대북 해상제재의 견고한 동반자”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정부가 대북제재 위반에 ‘연루됐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남북ㆍ북미 대화에서 불협화음을 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0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의 유엔주재 대한민국 대표부에서 만나 회담 전 악수를 하고 있다. 강 장관은 이날 남북대화 및 경제협력에 있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면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진=연합뉴스] |
▶문제는 美국무부 후원매체가 ‘한국’을 겨냥했다는 데에 있다= 주목할 점은 ‘미국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국제방송’인 ‘미국의 소리’(VOA)가 새로운 ‘대북제재의 구멍’으로 한국을 지목했다는 데에 있다. 미 정부가 한국의 움직임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매체가 한국을 겨냥해 비판적 보도를 지속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3월 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보고서가 나온 가운데 남북 철도협력 및 경협논의가 한창인 지금 시기에 보도가 나온 점에도 눈길을 끈다.
VOA의 보도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종전선언 및 제재 유예조치를 지속하려는 한국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는 미 조야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VOA는 ‘북한산 석탄 한국유입’ 관련 보도를 내보내는 동시에 북한에 대한 제재ㆍ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미 지식인층과 입법자들의 의견을 잇따라 보도했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상황에서 종전(end of war)를 선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특사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의 핵심사안은 북한의 비핵화라고 꼬집었다. 미 상원과 하원은 북한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 필요성을 강조했다. VOA는 미 국무부가 ‘대북제재 기피행위에 관여한 단체(entities)’를 향해 독자제재 및 강경조치 입장을 나타내자 이를 ‘한국을 향한 우회적 비판’이라고도 분석했다. ‘북한산 석탄 국내반입 논란’에 대한 VOA의 보도들은 이처럼 문재인 정부의 중재자에 대한 미 조야의 회의적인 시각을 투영하고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2일 오후 미국 방문 후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정 실장은 방미 기간에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 한미 공조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 |
▶가시밭길로 가득한 중재외교의 길…균형추를 맞춰야= 북한의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은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대남선전을 계속했다. 노동신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 북한 수뇌부의 의지를 선전하는 핵심매체이다. 한반도 전문가는 노동신문의 잇단 대남비난에 대해 “대북제재 완화 및 종전선언을 둘러싼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역할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논리를 VOA의 ‘북한산 석탄 한국반입 논란’보도에도 대입할 수 있다.
VOA의 연이은 보도와 노동신문의 대남비난은 우리의 가슴 한켠을 아프게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중재외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길인지 실감하게 된다. 당장 대화국면을 짠 상태에서 뒤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우리 정부는 ‘9월 유엔총회 계기 남북미 종전선언’을 향해 앞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금주 방미길에서 남북대화의 진전을 위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면제 및 유예의 필요성을 미국과 유엔 안보리에 주장하고 왔다. 강 장관과 정 실장의 방미를 계기로 9월 유엔총회 계기 남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선언을 실현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대화국면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중재외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중재외교의 핵심은 상호가 ‘윈-윈’(win-win)할 수 있도록 균형추 역할을 제3자가 수행한다는 데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중재외교는 지금 한미가 추진할 수 있는 대북 체제보장 조치에 쏠려 있다. 남북이 실현할 수 있는 비핵화 조치는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김 위원장은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는 말만 나오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고한 중재외교를 펼치려면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 조치뿐만 아니라 북한의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비핵화는 북미문제”라고 치부하는 건 무책임하다. 올 상반기 남북ㆍ북미 대화판을 이끈 게 문재인 정부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해체하는 데에 만족하는 등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우리 정부가 제동을 걸 줄 알아야 한다. 트럼프 정부가 비확산체제(NPT)를 깨는 데에 우리 정부가 견인자 역할을 하는 꼴이 돼버리면 한반도 평화국면의 정당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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