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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에 김지하 ‘오적’보낸죄로 358일 구금…법원 “국가, 1억 배상하라”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을 필사해 친구에게 전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사법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32부(부장 유상재)는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수감됐던 A씨와 가족 9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27일 밝혔다. A씨는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을 필사해 친구에게 전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수형생활을 했다. 양측이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지난 23일 확정됐다. 이에 따라 국가는 A씨의 어머니와 6명의 형제에게 총 1억 1000만 원을 위자료로 줘야 한다. ‘A씨 어머니와 형제, 자녀 2명에게 2400만 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보다 위자료 액수가 올라간 결론이다. 재판부는 “불법행위 후 39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 통화 가치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장기간 배상이 늦어진 사연을 특별히 참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가 위헌ㆍ무효라고 해도 이같은 이유만으로 당시 이뤄진 수사나 재판 자체를 위법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긴급조치로 인해 옥살이를 했다고 해서 바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지는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와 같은 취지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긴급조치9호의 위헌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위법했다고 결론내렸다. 재판부는 “수사관들은 A씨를 체포하면서 당시 유신헌법이나 구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고 있던 최소한의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상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침해했다”고 설명했다. 가혹행위로 받아낸 진술조서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 재판 과정도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A씨가 수감 당시 교도소 직원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출소 후 지속적으로 ‘불법사찰’ 당한 점도 모두 사실로 인정했다.

다만 피해 당사자인 A씨의 위자료 청구는 원심과 마찬가지로 각하됐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내용을 심리하지 않고 재판을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A씨가 이미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1400만 원의 생활지원금을 받아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취지다.

육군 하사로 근무했던 A씨는 지난 1976년 3월 긴급조치9호를 위반한 혐의로 영장 없이 체포됐다. 과거 잡지에 실린 시 <오적>을 동창생인 김효사 시인에게 필사해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오적’이라 칭하는 풍자시였다. 지하실에 갇힌 A씨는 2주 동안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으며 허위 자백 조서를 작성했다. 그는 유언비어 표현물을 소지한 혐의로 이듬해 2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확정받았다. 체포 직후부터 358일 동안 철창 신세를 졌다. 출소한 그는 전과기록 때문에 신원 조회를 하지 않는 출판사에서 외판원으로 전전해야 했다. 수사관들은 출소 후에도 A씨를 수시로 감시했고 매달 거주지를 확인했다. A씨는 지난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확정받았고,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고도예 기자/ye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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