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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르신도…휴가군인도…초등생도…포항의 눈물 닦아준 천사들
하루 400명 대피소 찾아 위로
10세 초등생 급식판 닦고
70대 어르신은 마사지 봉사
트라우마 극복 상담도 눈길


“밥은 나중에 먹어도 돼요.”

최연소 자원봉사자인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장성초등학교 3학년 정재찬(10) 군은 자기 몸통만한 크기의 급식판을 닦으며 말했다. 정 군은 포항시 흥해체육관 지진대피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빨간색 고무장갑을 털었다.

기자가 봉사활동을 돕겠다고 나서자 누군가 “재찬아 누나한테 자리 비켜드려”라고 말했다. 정 군은 좌식 의자를 한쪽으로 끌어 앉았다.


지진이 평범한 일상을 산산조각낸 포항에서 이재민들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의 손길 덕분이다. 22일 찾은 포항시 흥해체육관 지진대피소에는 마음의 고통까지 어루만져 줄 심리상담부터 허한 속을 데워 줄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끼 식사까지 준비돼 있었다.

지진 트라우마를 겪은 이재민을 위해 마련된 심리상담 부스에서는 이순미(61) 씨가 만다라 문양을 색칠하며 마음 속 잡념을 털어낼 수 있게 돕고 있었다. 이 씨는 진앙지와 가까운 포항 북구 주민이다. 이 씨는 “지진이 또 나면 대피하려고 옷도 다 입고 손에 현관키를 꼭 쥔 채 불 켜고 선잠을 주무시거나 온 가족이 신경이 예민해져 변비와 설사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들도 계시다”며 “저도 북구에 살기 때문에 같은 처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온전해야 그분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겠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지진 이재민을 위해 마련된 작은 도서관도 있었다. 포항시 이동도서관을 지키던 자원봉사자 김성순(74) 씨는 “이곳은 대출기간이 없는 특별한 도서관이다. 이재민 분들이라면 누구든 두 권 씩 마음 편히 읽으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일부러 책마다 붙이는 도서번호를 부착하지도 않았다.”며 웃어보였다. 어제 설치된 이동도서관에서는 현재까지 36권의 책이 이재민 독자들의 놀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자연재해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위협 받는 상황 속에서도 ‘두근두근 내 인생’,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가슴 뛰는 삶’, ’멋지게 나이들어 가는 법’ 처럼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서적을 대출해 간 모습이 눈에 띄었다.

김 씨는 “이곳에서 봉사하면서 정말 따뜻한 마음이었다. 특히 급식소에서 나눠드리는 음식을 드시면서 ‘집에서도 이렇게 못 먹고 살았다’며 감사함을 전해주셔서 정말 행복했다. 구호물품이 전국에서 오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한민국 만세’란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달려온 봉사자 채명희(57) 씨는 “가까운 지역인데 당연히 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채 씨는 “지진이 난 후로 한참 쓰러져 계셨다는 할머님이 찾아오셨다. 아는 분 집에 얹혀 있는 게 눈치보여 낮 동안 있을 곳을 찾아 급식소에 오셨더라.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섭다고 하셔서 따뜻한 차도 드리도 손도 꼭 잡아드렸다. 내일도 꼭 오시라고 신신당부 했다”면서 여전히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날 최고령 봉사자는 포항시 마사지 봉사팀의 전광호(74) 씨다. 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전 씨는 “좁은 텐트에서 지내다보면 근육도 뭉치고 두통도 온다”며 이날 하루 흥해 체육관에서 이재민 50여명에게 마사지 봉사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날까지 흥해체육관에는 매일 300~400명의 자원봉사자가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 흥해체육관 옆에 마련된 자원봉사자센터에는 파주ㆍ부산 등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지난해 지진 피해를 입은 경주다. 지진 피해의 아픔을 먼저 겪은 만큼 포항의 눈물도 가장 먼저 닦아주러 왔다는 후문이다. 덕분에 흥해체육관 이재민들은 첫날 세끼 따뜻한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이상섭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은 “이재민 중에도 봉사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돕고싶다고 나서는 분들이 계시고 휴가 나온 군인들이 소중한 하루를 반납하고 봉사하기도 한다. 광주에서 온 한 봉사자는 ‘밥이 불편하면 속이 메스껍고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를 한 박스 껴안고 오기도 했다”며 “이 자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국장은 “감사하게도 너무나 많은 도움의 손길이 오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봉사자 수가 적고 일거리는 많은 오전 7시~9시, 오후 5시~8시에 방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포항=김진원·김유진 기자/kac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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