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풍족한 시기에는 다툼이 필요 없다. 하지만 생존을 위협 받는 순간 영역 다툼이 시작된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전문과목 성역이 무너진지는 이미 오래다. 최근에는 한의사, 치과의사, 하물며 피부관리사까지 가세해 진료권을 두고 벌이는 영역다툼이 심화되고 있다.
그 중 의료기기 사용 문제는 고질적인 갈등을 불러왔다. 이미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등은 한의사 사용이 허용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료기기에 대한 전문적 식견도 필요없고,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의료기기를 제한 규정도 없이 의사가 아닌 누구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 단적인 예가 기미 주근깨 치료에 주로 쓰이는 의료용 광선치료기 IPL이다. IPL은 잘못 사용하면 매우 위험하다. 자칫 피부 손상이나 색소 침착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어 전문적인 의학 교육과 수련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은 뒤로한 채 IPL이 자연광 치료에 해당하므로 작동원리가 한의학적 원리에 벗어나지 않아 사용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지난 2014년, IPL을 한의사가 사용하는 것은 ‘유죄’, 한의사에게 허용되지 않는 ‘무면허의료행위’ 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실제 불법으로 IPL을 사용하다 발진과 홍조가 악화되거나 부작용으로 피부과를 찾는 환자들을 적지 않았다.
이뿐이 아니다. 자의적인 해석과 모호한 규정으로 사마귀 치료에 쓰는 탄산가스레이저를 한의사들이 통증완화 목적으로 쓰겠다며 식약처 허가를 받은 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의료계는 국민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레이저기기는 다양한 시술모드를 지원하는 의료기기로 의사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다며 판매됐다. 면허 외 의료행위 소지가 있는 레이저 기기를 다양한 시술효과를 들어가며 합법을 가장한 불법행위를 조장한 제조사 역시 문제다.
이처럼 애매한 법망을 이용해 검진이나 통증 완화를 빌미로 치료용 의료기기를 허용 받거나, 검진장비를 치료장비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의료분야는 자신이 전공한 고유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 안에서 시술이 이루어져야 부작용을 억제하고 해당 분야도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진료영역이 의료법상 규정돼 있음에도 간단한 교육만 이수한 뒤 누구나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피부과 의사가 한약을 조제하고, 이를 뽑고 침과 뜸을 뜬다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의료기술의 발전을 위한 조치’, ‘국민적 편의’ ?… 다 좋다. 하지만 의료행위는 편의를 넘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직결된다. 일부 교육 이수만으로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한다면 면허 범위를 넘어선 비윤리적인 의료행위가 판을 치게 된다.
정부는 이 문제를 의료계 ‘영역다툼’ 으로만 보지 말고 규정을 명확히 하고 대안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의사든 한의사든 치과의사든 자기영역에서 자부심을 갖고 진료에 임할 수 있다. 의료인들도 혹시 모를 부작용을 무시하지 말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 무엇을 초래할지 스스로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