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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관계 ‘해빙 고리’ 대북특사의 명암
박정희~노무현 밀사·특사외교
이명박·박근혜 정부 명맥 끊겨

북한과 미국 간 대결이 격해지거나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대북특사 파견’은 갈등을 풀 돌파구로 주목받아왔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 이후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를 제외한 역대 정부들은 남북한 밀사나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관리해왔다. 하지만 그 결과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으로 물꼬 튼 ‘대북밀사’= 북한과의 국력경쟁을 벌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것은 닉슨 독트린 때문이었다. 김일성 당시 북한 국가주석도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에 충격을 받았다.

주한미군 철수 압력과 미중관계 완화에 직면하게 된 박 전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대북밀사로 발탁했다. 1972년 3월과 5월, 임무에 실패했을 경우 목숨을 끊기 위해 청산가리를 폼고 방북길에 오른이 전 중정부장은 남북한 최초의 합의문서인 7ㆍ4 공동성명을 이끌었냈다. 당시 방북 성과로 이 부장은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과의 소통채널인 ‘이후락-박성철’라인을 만들었다.

이후 전두환 정부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박철언 안기부장 제2특보를 대북밀사로 발탁해 남북 이산가족 교환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88올림픽 공동개최와 남북정상회담은 주요의제 및 시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정권에 따라 운명 달리한 대북특사
= 대북밀사와 공식적 대북특사들의 활동성은 정권의 성향과 국제정세에 따라 달라졌다. 특히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우리 대북특사의 입지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남북간 밀사왕래를 활성화시켰다. 그 결과, 1990년 9월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와 더불어 남북 국회회담, 적십자회담, 체육회담 등이 재개됐다. 같은 해 9월 30일 서동권 안기부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하지만 의제와 시기를 놓고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고, 북측은 1993년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남북대화를 거부해 밀사왕래가 끝났다.

이후 북측은 김영삼 정부에 남북 ‘밀사’가 아닌 ‘특사’교환을 제안했지만, 북한이 핵개발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박영수 북한 대표단장이 8차 남북 고위급 회담 도중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발언해 특사교환이 무산됐다. 당시 고조된 한반도 위기를 수습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대북특사 역할을 맡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었다. 당시 미국의 주선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가 트였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남북한은 1994년 7월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했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대북 특사 시대’ 포문 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측에 대북밀사가 아닌 특사교환을 공식 제안했다. 하지만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연평해전이 일어나면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됐다. 이 가운데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접촉, 담화에 나섰다. 특히, 임 전 원장은 2000년과 2002년 4월 2003년 1월 특사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남북간 갈등을 푸는 역할을 수행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만나 6자회담의 돌파구를 열었다.

하지만 2006년 북한이 미국 독립기념일에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1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한반도 정세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2007년 8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대북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두 차례 방문해 위기관리에 나섰다. 김 전 원장은 2005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에게 공식 임명장을 받은 최초의 공인된 대북특사이기도 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북특사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도 북한과의 적극협력에 나서 북한이 2008년 영변의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을 활용한 핵실험을 추가감행하면서 대북특사 시대는 막을 내렸다. 

문재연 기자/mun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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