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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울한 명절, 고단한 청춘] “떡국은 언감생심…토익공부나 할래요”
극심한 취업난에 명절 반납
도서관 전전하는 청년 늘어
“부모님 뵐낯 없다” 쓸쓸한 풍경


서울 성북구에 사는 이모(27) 씨는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50여곳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모조리 낙방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지난해 인천의 한 대학원에 입학했다. 5평 남짓 쪽방에서 살며 받는 연구비의 절반을 월세로 냈다.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 700원짜리 삼각김밥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하루 3~4시간을 잤다. 발표를 앞둔 날은 그마저도 포기했다. 처음에는 흰 머리가 생겼다. 그러더니 눈에 띄게 머리가 빠졌다. 1주일간 몇 시간을 마음 편히 잤는지 세어봤다. 20시간이 채 안되었다. 3달 전 이 씨는 담당 교수를 찾아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털어놨다. 만류하는 부모님께 “지금 내 심정을 아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

자퇴 절차를 밟고 쪽방에 돌아온 이 씨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럽게 울었다. 수백만원 돈을 들였지만 남은 것이라곤 몇 번 보지도 않은 대학원 전공 서적, 만료를 1~2달 남긴 토익 성적표 뿐이었다. 이 씨는 “부모님을 찾아갈 낯이 없다”며 “설 명절도 쪽방에서 토익 공부나 하면서 보내겠다”고 했다.

‘청년 실업률 10%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설 명절은 힘든 시간일 뿐이었다. 부모님 뵐 낯이 없어 떡국은 언감생심,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청년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신모(26ㆍ여) 씨는 한달 전에 사표를 냈다. 2년 전 연이은 낙방에 아무 곳이나 취업부터 하자고 생각해 들어간 중소기업이었다. 하루 12~14시간을 일했다. 야근은 기본에 휴가 하루 쓰기도 눈치가 보였다. 이것저것 다 떼고 나니 통장에 남는 돈은 한달에 180만원 남짓이었다.

상사에게 불만을 표시하면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는 핀잔만 돌아왔다. 온 종일 마우스를 잡다보니 손목 터널 증후군이 생겼다. 불면증이 심해 약 없이는 잠들지도 못했다. 경상도에 본가가 있는 신 씨는 “금의환향을 해도 모자랄 판에 몸과 마음 모두 병든 상태로는 가고 싶지 않다”며 “부모님 시선으로 보면 나는 패배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이은 취업 실패에 부모님만큼 친척을 볼 자신이 없어 설 명절을 반납한다는 청년도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 김모(24) 씨는 취업 전까지는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했다. 김 씨는 “그래도 장남인데 제 노릇을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며 “친척들을 만날때면 괜히 눈치도 보이고, 번듯한 곳에 취업한 사촌들과 비교만 될 것 같아 안 가기로 했다”고 했다.

이어 “어디든 합격하면 당당히 친척들 얼굴을 보겠다”며 “연휴 내내 도서관을 찾아 상반기 공채나 준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꼭 합격해서 다음 명절부터는 당당히 고향을 찾기 위해서다.

이 같은 모습에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극심한 취업난에 따라 명절을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며 “(이러한 현상은) 지금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과 같다”고 진단했다.

이원율 기자/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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