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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이 책!] 첫날밤 처녀막 피 재현·터부시한 승마 중세 유럽 ‘언니’들의 웃지못할 이야기
여고시절, 학교에서 준 순결캔디를 아작아작 깨 먹으며 분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딴 걸 주다니!’. 여고생들의 성적 욕망을 ‘순결’ 논리 하나로 뒤집어씌우는 학교의 기획물에 넌더리가 났다. 대충 좋게 먹어주자, 괜찮은 체했지만 요즘 말로 ‘프로 불편러’였던 나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간식 먹듯 사탕을 입에 문 우리를 노회한 여선생님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만족하셨을까.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여자 청소년이 자신의 욕망을 말하는 존재로, 성적 주체로 인정받는 날은 요원해 보인다. 누군가의 판타지로 소환되고, 인용되는 경우야 허다하지만.

‘버자이너 문화사’ 책을 알게 된 건 2년이 지나서였다. 대학에서 페미니즘 잡지를 만드는 친구들을 만났고, 강요된 여성성에 대한 반발로 삭발을 한 전설적인 ‘언니’들에 고무되기도 했다. 나도 곧 분위기에 물들었다. 우리학교 여자들은 왜 화장도 안 하고 성형도 안 하냐고 불평하는 남자동기에게는 “하고 싶음 너나 하라”며, ‘미러링’도 날려줬다. 



하루는 캠퍼스 한구석에서 여성주의 수다 동지들과 오르가슴 이야기를 하는데 ‘버자이너 문화사’책이 계속 튀어나왔다. 예닐곱 살 때 기지개를 켜다 우연히 오르가슴을 느끼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우리는 ‘버자이너’에 소개된 억압적인 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간 언어화된 적 없는 욕구들이 욕구로서 말하여지기 시작했다. ‘버자이너 문화사’는 우리들의 훌륭한 텍스트였다.

지난해 여성혐오 범죄와 논쟁에 상처받았던 한국 여성들은 대중적인 저항의 언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10년 만에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버자이너 문화사’는 1차 저항을 끝낸 여성들이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책이다. 억압적으로 성장한 자신의 몸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방시키는 단계를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성과학자인 저자 옐토 드렌스는 수 세기 동안 세계 여러 문화권에 흩어져 있던 여성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성의 테두리 안에 그러모으며 새로운 ‘보편’을 시도했다. 해부학적인 설명을 곁들고 각종 고문헌을 통해 버자이너의 역사를 들려주는데 첫날밤 처녀막의 피를 재현하기 위해 애쓴 11세기 유럽 ‘언니’들의 고생담을 읽다 보면 눈물도 난다.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까 봐 허벅지를 모은 채 페달을 밟는 재봉틀과 승마가 불결한 취급을 당하기도 했단다. 저자는 인간의 성을 생물학적 신념에 한정하지 않고 사례를 통해 다양성의 측면에서 조망한다. 또 인간의 성 체험에서 오르가슴을 최고의 경험으로 치부하는 식의 단 하나의 방향성은 없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들의 입장을 소개하며 독자에게 속삭인다. 이제, 우리들의 버자이너를 사랑해줄 타이밍이라고.

도서출판 동아시아 에디터 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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