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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훅INSIDE] 시국선언문에 담긴…정유라에 대응하는 대학생들의 자세
[HOOC=이정아ㆍ신동윤 기자] 전국 40여 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발표한 시국선언문을 차근차근 읽었다. 어떤 단어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분석했다. 그리고 A4용지로 58페이지가 넘는 무수한 글자들이 하는 말은, 두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약됐다.

“‘최순실 씨(297회)’의 ‘국정농단(177회)’ 사건으로 ‘대한민국(259회)’의 ‘민주주의(241회)’가 무너진데 대해 ‘분노(130회)’한다. 또 이번 사태의 최종적인 책임자가 ‘대통령(336회)’ 자신인 만큼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걸맞는 ‘책임(226회)’을 ‘박근혜(277회)’ 대통령이 직접 져야한다.”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대학생들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전국 40여개 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발표한 시국선언문에 사용된 단어들로 다시 제작한 시국선언문. [제작=홍윤정 HOOC 인턴 디자이너]

그런데 시국선언문을 읽다 가슴을 탁 친 단어는 따로 있었다. ‘정유라’, 최순실 씨의 딸인 그녀의 이름. 무려 70회나 언급됐다. 재임 기간 내내 불통으로 불린 최경희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정부 커넥션 그 밑바닥에는 “공주님”의 입학 특혜와 묻지마 학점이 똬리를 틀고 있었으니, 같은 시대 같은 나이 또래로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분노는 소위 ‘빽’으로 온갖 특혜를 누렸던 정 씨에게 향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최근 대학가에서는 ‘대한민국 권력서열 2위는 정윤회가 아니라 정유라’라며 비웃고 있을까.

지금까지 정 씨에게 불거진 ‘특혜’ 의혹들을 낱낱이 설명하기도 벅차다. 그녀는 선화예술학교(중학교 과정)에 다니면서 총 수업일수 205일 가운데 86일만 출석했지만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그녀가 입학하기 직전 청담고등학교는 승마를 갑자기 체육특기자 전형에 추가했고, 그녀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있었을 때 이화여자대학교는 승마특기생 입학전형을 신설했다.

그녀는 130일이 넘게 결석했지만 청담고를 졸업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과제 걱정일랑 접어두고 “행복한 승마 되시길” 기원했던 대학 교수들 덕분에 학업 수준에 미달됐는데도 학점을 취득했다. 그녀에게 대학입학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 모 교수는 8억 원이 넘는 정부 연구비를 받았고, 삼성전자는 그녀에게 명마를 지원했다. 이 정도면 그동안 온 우주가 나서서 공교롭게도 ‘정유라’를 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당당하다. “공주들”은 태생적으로 ‘논란’ 따위는 간단히 무시하는 게 본분인 듯 싶을까 싶을 정도로. 2014년 9월, 인천 아시안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 인터뷰를 가진 정 씨는 그해 4월 이후 불거진 공주승마 특혜 배경 논란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 뭐, 신경 안 써요. 공주라는데 기분 좋죠 뭐, ”라며 ‘호호’ 웃으며 답했다. “진짜 공주(태국 선수)를 이겨서 기분 좋다”고도 했다. 이를 스무 살을 갓 넘긴 철부지 대학생의 단순 일탈로 치부할 수 있을까. 

사진=정씨의 인터뷰 영상 캡처(제공=SBS 비디오머그)/정씨의 SNS글 캡처

‘돈도 실력’이라는 황금만능주의도 문제겠지만 더욱 기가 막힌 건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그녀가 SNS 계정에서 언급한 대목에 이르러서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기득권층의 불공평한 현실을 수용하라고 윽박지르는 정 씨의 태도에서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 발언 이후 또다시 경고등이 켜졌구나 싶었다.

그러나 2016년을 살고 있는 대학생들은 의젓하고 쿨하게 응답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횡령으로 얼룩진 돈이 실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한국과학기술대학교 총학생회) ‘정당한 노력을 비웃는 편법과 그에 익숙해져 자연스레 얻어진 무능. 그게 어떻게 좋고 부러운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이화여대 대자보) 쌀쌀한 가을 저녁, 대학생들이 쓴 시국선언문과 대자보를 읽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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