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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31. 미술관같은 벽화 거리, 아실라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여기는 탕헤르(Tangier), 모로코의 북쪽 항구도시다. 모로코의 마지막 일정인 이곳에서 숨을 고르기로 한다. 벽화로 유명한 서쪽 마을 아실라(Asilah)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간다. 여행속의 소풍인 셈이다.

2주일 전 스페인 타리파(Tarifa)에서 페리를 타고 모로코에 첫 발을 내디딘 탕헤르가 생각난다. 항구에서 바로 기차역으로 간데다 금방 해가 저물어서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었다. 항구에서 가까운 메디나의 풍경은 예스럽지만 탕헤르의 신시가지는 그 자체로 대도시다. 탕헤르의 위치가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는 곳이라 로마, 아랍의 지배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기도 했다고 한다. 메디나가 전통적인 모로코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반해 신시가는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아실라로 향하는 기차가 온다. 플랫폼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게 눈에 띈다. 모로코를 잘 알지 못했을 때는 막연히 무슬림 국가이고 아프리카의 나라라는 선입견이 앞섰다. 이곳에 와보니 도시의 모든 곳이 다 쾌적하지는 않아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아실라로 가는 길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답다. 모로코 서북단에는 노랑 빨강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쉐프샤우엔에서 사람들과 북적이다가 다시 혼자가 되어 기차에 오른 기분이 묘하다. 어제는 추억으로 흘러가 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은 내일 걱정하면 된다. 여행자에게는 “지금”이 있다. 오늘, 여기의 나는 하루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실라 기차역에 도착한다. 역은 그리 크지도 않다. 메디나로 가야 하는데 방향을 모르겠다. 누굴 붙잡고 물어볼까 싶은데 이미 메디나로 가는 승합차가 손님을 기다린다. 생각보다 쉽게 아실라의 메디나로 간다.

메디나를 둘러싼 성벽 안으로 들어간다. 아실라는 모로코의 다른 곳보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해마다 여름이면 아실라 국제 문화 축제가 개최된다고 한다. 아실라의 메디나는 하얗게 칠해져 말 그대로 캔버스가 되고 사람들은 그 흰 벽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해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벽화로 유명한 마을이 바로 아실라는 여름이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축제에 빠지는 곳이다. 



관광객이 적은 시즌이라서인지 아직 오전이라서인지 아실라의 메디나는 고요하다. 태양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내리쬐고 있다.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잘 어울린다. 방향을 정하지도 않고 걷다 보니 예쁜 벽화가 그려진 학교 건물 앞에 오게 된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벽화에는 한국어가 쓰여 있다. 한국 봉사단들도 이곳에 와서 벽화를 그린다고 들었는데 작년의 벽화가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일까? 모로코의 바닷가 마을에서 만나는 한국어와 한국인의 손길이 간 벽화를 보니 여기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 한국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로코를 여행했는데 모로코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구나 싶다.



같은 대서양에 면한 바닷가 마을이어도 남쪽의 에싸위라의 메디나와 느낌이 다르다. 에싸위라에서는 높은 성벽 때문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메디나를 걸었는데 아실라에서는 산뜻하게 칠해진 하얀 성벽 뒤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을 뿐인데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망루로 나가는 길로 접어든다. 벽돌로 쌓아 올린 망루는 바닷가를 조망하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낮은 것 같아도 망루 아래는 족히 십여 미터는 될 법하다. 돌아다닐 때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도 이곳에 오니 여행자들이 많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짙푸른 수평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다. 이렇게 파란 하늘과 바다는 여행 중에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바다를 실컷 보고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사하라 사막과 아틀라스 산맥과 대서양이라는 바다, 모로코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망루에서 바다를 등지고 메디나를 돌아다보면 이곳이 유럽의 어디쯤이라도 되는 듯 하얗고 파란 풍경이 펼쳐진다. 분명히 모로코인데 지금까지 보았던 모로코와는 다른 풍경이다. 



사람의 소음을 피해 다시 메디나의 골목으로 돌아온다. 하얀 벽에 파란 창틀과 문은 그리스의 산토리니, 미코노스를 연상시킨다. 똑같은 풍경이어도 어디를 처음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모로코에서는 들르는 곳마다 개성 있는 메디나를 다녀서 오늘 아실라의 메디나도 모로코의 수많은 메디나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메디나의 색이 쉐프샤우엔처럼 파랗게 통일된 것은 아니다. 벽은 파랗기도 하고, 하늘빛, 갈색, 보랏빛 등의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고 타일을 붙이거나 그림을 그린 곳까지 각양각색이다. 하얀 벽이 배경이 된 다양한 색과 그림은 혼란스럽지 않고 정갈하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집 앞 골목에 앉았다가 모퉁이를 돌면 아까 만난 다른 여행자들이 툭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지 고요한 골목을 누비는 사람은 여행자들이다. 아까 기차역에서 함께 승합차를 타고 온 모로코 커플들을 다시 만난다. 둘의 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고 해서 예쁘게 찍어주고 덕분에 나도 사진을 부탁한다.

야외 미술관에라도 온 듯 아름다운 벽화들을 감상하며 걷는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서인지 옷이나 가죽제품, 그림을 파는 가게가 많기는 하지만 거리는 한산하고 사람들은 조용하다. 아실라의 메디나는 다른 도시의 메디나보다 깨끗하고 세련되었지만 그렇다고 관광지 특유의 상업적인 느낌도 없다. 



오후가 되어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다. 오전에 지날 때 조용하던 학교 앞에는 이제 아이들이 바글거린다. 저학년이어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엄마가 마중 나온 아이들도 있고 아이스크림 파는 노점 앞에는 줄이 길다. 참새처럼 재잘재잘 거리는 모습이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다름이 없다.

꼬마들이 휩쓸고 간 담장 아래서는 형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KOREA”는 알겠지만 “사랑”이라고 벽에 쓰인 한국어를 아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담벼락 앞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니 괜히 내가 뿌듯해진다. 이 몇 마디 한글에도 마음이 이런데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영어가 공용어인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술작품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은 벽화들도 보이고 벽을 그저 하얗게 칠하고 있는 페인트공 할아버지도 보인다. 이렇게 하얀 캔버스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해마다 색다른 그림이 그려지는 여름 축제에 와보고 싶다. 



골목을 빠져나와 걷다 보니 발길은 메디나의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아무런 그림도 없이 흰 벽과 이슬람의 상징 녹색으로 칠한 문이 조화를 이루는 모스크와 공공건물은 모로코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메디나 바깥은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늘어서 있고 한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실라에서는 말을 타고 해변으로 간다고 하더니만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버금가는 핑크빛 마차가 해변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아실라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참 아름답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남색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그리고 초록빛이기도 하고 하늘빛이기도 한 바다의 색과 높지 않은 하얀 파도의 포말이 멋있다. 어제는 쉐프샤우엔의 산골에 외국 친구들과 있었는데 오늘은 아실라의 바다를 혼자 바라보고 있다.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 근처에는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다. 하늘과 바다와 꽃이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탕헤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려고 가까이 있는 경찰관에게 기차역 가는 방법을 묻는다. 경찰은 웃으면서 기차보다 그랑택시를 타라고 권해준다. 모로코에서 택시는 시내 교통수단인 쁘띠 택시(Petit Taxi)와 시외로 나갈 때 타는 하얀색의 그랑 택시(Grand taxi)가 있다. 경찰관이 가리키는 곳은 메디나 바깥이라 현대적인 거리다.

연식이 오래된 벤츠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정원이 여섯 명인 그랑택시는 삼십 분쯤 기다리니 인원이 찬다. 옆에 앉은 모로코 남자와 어린 부인은 탕헤르까지 가는 내내 수다를 떤다. 창밖으로 모로코의 들판이 휙휙 지나간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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