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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 카페] 찌질한 사내 vs 맘충이…한국남녀 자화상?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허세·욕설·욕망이 난무하는 세계
헛꿈꾸는 남자들의 웃픈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학교·직장·가정의 뿌리깊은 성차별
30대중반 여성의 빙의 통해 비판


“남자들은 어둠을 밝혀줄 전깃불을 만들고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처럼 배를 만들어. 여기는 남자들의 세상, 남자들의 세상이지. 하지만 여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소용없어.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쓰라림에 헤맬 뿐.”

‘우리시대 이야기꾼’ 천명관의 신작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는 제임스 브라운의 동명노래를 도입부로 삼고 있다. 


남자란 종의 본질을 압축한 노래처럼 소설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줄줄이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지는 나그네쥐를 연상시키는 이해하기 어려운 허세와 구라, 욕설, 욕망으로 가득찬 사내들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인천 뒷골목의 명성이 짜한 조폭 두목을 중심으로 인생의 한 방을 찾아 헛꿈을 꾸는 사내들의 찌질하고 우스꽝스런 이야기는 한 편의 코미디 영화처럼 읽힌다.

정식 조직원이 되고 중간 보스가 되는게 꿈인 건달 울투라는 사설경마에 투자한 두목의 심부름으로 말을 손 보러 갔다가 우연히 종마를 훔쳐와 몰래 키우게 된다. 종자의 가치는 무려 35억원. 울트라는 종마를 끌고 도주하기 시작한다. 인천 연안파의 전설, 양 사장은 그동안 몸을 사렸다가 좀더 열심히 일해 보자며, 밀수 다이아몬드에 손을 댄다. 이 다이아 냄새를 맡고 전국 각지의 건달 두목과 조무래기 양아치들까지 모이며 한바탕 도박이 벌어진다. 건달, 양아치, 삼류 포르노 감독, 대리운전사,사기꾼 등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멋진 내일을 꿈꾸며 내달린다. 오직 자신의 현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성공,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줄 멋진 그 무언가를 향해 직진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멍청하기도 엉뚱해 보이기도 한다. ‘나쁜 놈’은 분명한데 독하지 않다는데 페이소스가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울트라는 양 사장이 벤츠를 세차해오라는 고작 심부름에 “잘만 하면 사장님 밑에서 벤츠 운전을 하다 눈에 들어 정식 조직원이 될 수도 있고, 또 밑에서 몇 년 잘만 보이면 중간보스로 고속승진을 할 수도 있을 터”라며 들뜬다.

사설경마의 거물인 원봉은 경마로 몰려들었던 도박꾼들이 스포츠 도박판으로 옮겨가자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사는 재미를 잃는다. 그즈음 그가 관심을 돌린 건 차와 멋진 슈트. 그는 “값비싼 이태리제 양복으로 잘 차려입고 나서면 잠시 기분이 근사해지곤”한다.

인천 뒷골목의 노회한 일인자 양 사장이 배신자를 찾기 위해 쓰는 방법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일종의 명상 요법. 주변에 관계된 인물의 리스트를 모두 전지에 적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떠올리며 지워나가는 식이다.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다이아를 쫒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아수라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생생한 거친 입말, 천명관의 능청스런 입담, 욕망의 판타지가 어우러져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천명관의 주인공들이 찌질한 사내들이라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흔한 이름, ‘지영’으로 대표되는 30대 중반 한국 여성의 자화상이다. 어린 딸을 둔 서른네살 김지영이라는 한 여자의 이야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들어있다. 



3년 전, 결혼해 딸을 낳은 김지영은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살고 있다. 정대현 씨는 IT계열의 중견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씨는 밤 12시가 다 돼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소설은 김지영씨가 어느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며 시작된다. 추석에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친정엄마로 빙의해 속말을 뱉어내는가하면 남편의 결혼 전 애인으로 빙의해 놀라게 한다. 이를 이상히 여긴 남편은 김지영씨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 씨는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은 담당의사가 그녀의 인생을 재구성해 기록한 리포트 형식이다.



지영씨의 이야기들은 제도적으로 성차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내면화된 뿌리깊은 차별이 존재함을 보여준다.‘그때 그 상황’에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기고백의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김지영은 이 시대 여성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회사생활, 결혼생활에 이르기까지 여성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경험들은 모두 사실과 통계 자료에 근거한 것들로 지난 20여년간 성차별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2014년 말 촉발된 ‘맘충이’사건을 목격하고 소설을 구상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전업주부였던 작가는 여성, 특히 육아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맘충’은 제 아이만 싸고도는 일부 몰상식한 엄마를 가리키는 용어로 육아하는 엄마 대부분에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면서 많은 상처를 주었다. 사실적이고 공감대 높은 이야기가 다큐처럼 읽힌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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