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작품이 공통적으로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정치의 실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작품은 현실의 정치적 사유를 넘어선 예술적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천한 정치적 사유가 예술적 상상력마저 포박한 결과다.
현실이 답답하니 이들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일텐데, 현실이 워낙 극적이어서 그런지, 영화가 현실을 다루는 태도도 노골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유는 깊지 못하고 풍자나 비판은 날카롭지 못하다.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는 코미디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재난의 위협은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우며, 영화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을 뛰어넘기가 더 어려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올해 최고 흥행작인 ‘부산행’을 보자, 이 작품은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에서는 전통을 찾아보기 어려운 서구적 캐릭터인 좀비를 전면에 등장시켜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왜 좀비일까. 좀비영화에서는 흔히 좀비나 좀비 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을 뚜렷이 제시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서구의 전통이나 문화에서는 좀비는 비밀스럽고 주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에서도 좀비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은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바이오제약회사의 신약개발과 관련된 실험일수도 있다는 사실이 살짝 언급하는 정도이지 뚜렷한 인과관계로 보여주진 않는다.
아마도 좀비가 ‘기원 불명의 존재’이이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덮친 비극적인 사건 사고나 재난은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발생 원인도, 책임자도 규명되지 못하고 조사나 수사가 종결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건이나 메르스사태나 가습기살균제피해사태 등 어느 하나 국민들이 속시원할 정도로 사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규명된 것이 없다. 미르ㆍK스포츠재단이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정치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다.
‘부산행’과 ‘터널’은 국가 시스템의 붕괴을 보여준다. ‘곡성’의 경우 진실을 알 수 없는 사건 사고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음모론이 창궐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이를 공권력이 규명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정상적인 과정이 무너진 한국 정치ㆍ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성공에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