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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원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을까
이광수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여전히 친일과 문학적 평가 사이에서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광수 연구가’로 이름이 높은 하타노 세츠코 니가타현립대 명예교수가 쓴 이광수 평전,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원제: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는 저자가 최근 몇년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광수 연구성과를 고스란히 녹여냈다.

세츠코 교수는 메이지 시기와 다이쇼 시기에 걸쳐 일본에 유학한 이광수의 눈에 일본은 어떻게 보였는지, 이광수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였는지,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광수의 생애를 추적해나간다.

1905년 여름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도착한 13세의 소년 이광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벽돌로 지은 서양 건축물이었다. 한성의 남대문역 주위는 초가집뿐이던 이광수의 눈에 근대 일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조선은 위태로운 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1월 대한제국이 제2차 한일협약과 더불어 외교권을 빼앗겨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1907년에는 고종의 양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의병운동 등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국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광수는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잡지 ‘신한자유종’을 간행, 애국심을 북돋는 비분강해형 문장을 동료들과 공유한다. 이는 곧 압수돼 극비문서 속에 들어있다가 2012년 발견됐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910년 8월29일, 역 대합실 벽에 붙은 한일병합 조서를 보고 “일본은 힘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았다.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는 것도 ‘힘’이다”는 힘의 논리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는 1917년 1월 ‘학지평’에 발표한 ‘우선 짐승이 되고 연후에 사람이 되라’는 글에 이르면 더 격해진다.

저자는 친일인가 문학성인가라는 해묵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차분히 그의 글과 생애 전 행적을 좇으며 이광수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광수의 친일행적으로 불리는 일본유학생 학병지원권유와 일본어로 쓴 친일소설에 대한 사실과 증언에 입각한 이광수 옹호에서는 저자의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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