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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난과학] “나는 비정규직도 아닌, 학생연구생입니다”
[HOOC=이정아 기자] #. 지난 3월, 대전 한국화학연구원의 한 실험실에서 학생연구생으로 일하던 A(26) 씨는 서로 다른 물질을 섞는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 플라스크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폭발하면서 그가 손에 잡고 있던 플라스크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A 씨는 보안경과 안전장갑까지 착용했지만,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손에 박혔습니다. 이 사고로 A 씨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과 다섯 번째 손가락이 절단되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길은 없습니다. A 씨는 연구원이 아닌 학생연구생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연구생(이하 학연생)은 대학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학연 협동과정을 맺은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나 산업체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학생입니다. 한 마디로 학생 신분으로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이공계 대학원생 대부분이 학교수업 외에도 연구개발 과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대다수 한국의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학연생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째 이들은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닙니다.

"나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닙니다"

학연생은 학생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실상 근로자처럼 일합니다. 하지만 학생과 근로자라는 이중적 지위로 인해 법적으로는 근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들이 임금, 휴가 등의 근로조건, 그리고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일단 출연연이나 산업체에서 일하는 학연생은 근로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현행법상 ▷근로기준법 ▷기간제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노동법의 보호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돼 있습니다.

그래서 학연생은 산재보험 대신 ‘연구활동종사자 보험’에 가입되는데요. 보상액이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연구활동종사자보험 1인당 평균보험료는 산재보험의 3분의 1 정도. 산재보험의 1인당 평균 보험료가 연 35만 원 정도(근로자 100인사업장, 임금총액 50억 원)라면 대학 학부생의 경우 연 3000원, 연구기관의 경우 연 10만 원 수준입니다. 학연생 사이에선 “실험하다 다치면 나만 O된다”는 과격한 말이 오갈 정도죠.

자료: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실

게다가 학연생의 임금 수준은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합니다. 이들이 근로자처럼 일하고 받는 임금은 비정규직 연구원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석사과정 중인 A 학연생은 “주말에도 실험하러 나가야 하고, 밤을 꼬박 새며 일해야 하지만 야근 수당은커녕 월급은 쥐꼬리만한 정도”라고 토로합니다. B 학연생도 “선임연구원들 뒤치다꺼리만 안 하면 그걸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죠. 지방국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C 학연생(33)은 “밤늦게까지 직접 실험을 해서 데이터를 구하는 나날들이 대부분”이라며 “논문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를 만들어도 논문 저자에 학연생 이름은 제외된다”고 설명합니다.

고용 형태도 불안하고 처우가 암담한데도 학연생의 수는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정부가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해법으로 ‘비정규직 정원제’를 도입하면서 대부분 출연연이 정규직 채용을 늘리는 대신,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빈 자리를 학연생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25개 출연연에 근무 중인 인력(1만9625명) 중 19.8%가 학연생입니다.

자료: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실

신명호 한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정책위원장은 “정부부처가 공공연구기관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공모방식의 연구과제를 경쟁적으로 진행하다 보니 각 출연연이 단기성 프로젝트 사업에 집중했다”며 “그 결과 출연연이 학연생과 같이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채용 형태를 선호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출연연이 금방 성과를 낼 수 있는 3년 미만 소형 단기과제를 선호하다 보니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연구하고 빠지는 학연생도 자연스레 많아졌다는 것이죠.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학연이나 인맥이 좋은 박사들만 정규직으로 채용되고 학연생은 학생이라는 이유로 연구기관에서조차 함부로 굴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합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늘어나기 시작한 학연생. 국내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6년간 학연생으로 근무했던 D 학생(34)은 “이제 담담해졌다”며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정부 과제가 끝날 때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인턴 마냥 저도 같이 버려졌습니다. 두세 번 겪다 보니까 이제 화도 안나요. 난 그냥 그런 존재인가 보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무슨 연구개발(R&D)을 하고 창조경제를 하겠다는 건지 학연생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학연생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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