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도넘은 증거인멸, 속타는 檢警 ①] “꼭꼭 숨겨라”…옥시ㆍ롯데 배경엔 ‘허점투성이 법조문’
-옥시ㆍ롯데의 증거인멸에 벽부딪힌 검찰 수사

-형법상 자기범죄에 관한 증거인멸은 처벌못해

-“자기 방어권 보장” vs “진실 규명 방해” 대립



[헤럴드경제=김현일ㆍ고도예 기자] 올 상반기 ‘롯데그룹 비자금 의혹’과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수사에 나선 검찰은 증거인멸과의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검찰은 지난 달 두 차례에 걸쳐 롯데그룹 본사와 계열사들에 대해 대규모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러나 임원진의 책상과 금고는 텅 비어 있었고, PC 하드디스크도 이미 파기된 후였다. 롯데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삭제 프로그램 ‘WPM(Wipe Manager)’으로 전자문서들을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삭제해 수사팀을 당황케 했다. 올해 초부터 롯데그룹에 대한 내사를 벌여온 검찰이 수사에 본격 착수한 이유 중 하나로 이같은 증거은폐ㆍ인멸 행위를 지목하기도 했다.

증거인멸 수위와 방법이 도를 넘으면서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은 관련 이미지. [사진=게티 이미지]

가습기 살균제의 최대 피해를 양산한 옥시레킷벤키저(옥시) 역시 통증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의 인터넷 게시글을 압수수색 직전 삭제하고, 불리한 실험보고서를 은폐ㆍ조작한 정황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법조계에선 그동안 이같은 증거인멸을 수사방해 행위로 보고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현행법상 증거인멸죄 성립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기소를 하더라도 재판에서 종종 무죄가 나오기도 한다.

형법은 증거인멸죄에 대해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는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자기 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경우에는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음을 뜻한다.

지난 2013년 대법원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를 파기한 혐의로 기소된 진경락 전 과장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진 전 과장이 자기 범죄와 관련된 증거를 인멸했다고 보고 처벌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례는 ‘본인이 형사처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자기 이익을 위해 증거를 인멸했다면, 그 행위가 동시에 다른 공범자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결과가 된다고 하더라도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시켜 자기 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게 했다면 증거인멸교사죄가 적용된다. 그동안 대기업 총수 일가에 대한 수사가 있을 때마다 증거인멸은 반복됐지만 총수가 아닌 일부 임직원에게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하는 것으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총수를 비롯한 윗선에서 증거인멸을 직접 지시했는지 여부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이번에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롯데면세점 입점로비 창구로 지목된 BNF통상 역시 대규모 증거인멸 정황이 포착됐지만 회사 대표 이 씨에게만 증거인멸교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이 씨는 검찰 조사에서 신 이사장의 증거인멸 지시 의혹에 대해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기업사건에서 증거인멸 행위에 대해 “수사에 지장을 초래하고,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범죄”로 지적하며 엄중한 처벌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법무법인 도움의 조현욱 변호사는 “자기 사건에 관한 증거인멸 행위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자기 방어권 보장 차원”이라면서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증거인멸 행위가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방어권도 중요하지만 증거인멸로 객관적인 진실이 완전히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정한중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기 범죄의 증거를 숨기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 본인 사건의 증거인멸까지 처벌하는 것은 이러한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며 “자기 방어권 차원에서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joz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