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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를 품은 큰바위얼굴, 운무를 걷어내고…
천개의 바위, 만개의 골짜기 ‘남한의 금강산’ 월출산 비경…왕인박사의 고향 영암엔 그를 신으로 모시는 일본인들 끝없는 발길


南州有一畵中山(남주유일화중산)

月不靑天出此間(월불청천출차간)

‘남도에 제일가는 그림 같은 산 있으니, 달은 청천에 뜨지 않고 산간을 오르더라’

150년 선배인 매월당 김시습의 이같은 감탄을 믿고 영암 월출산(809m)에 올랐던 고산 윤선도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山中新曲)라면서 가벼운 아쉬움을 토한다. 병자호란때 의병으로 참전하며 농민들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인조가 항복하자 알현 조차 하지않아 눈 밖에 난 뒤였다.

하지만, 고산은 알고 있었다. 저 운무가 머지 않아 걷히리라는 것을. 그는 시의 마지막 연에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히랴!”라고 노래한다.

2016년 6월10일 이른 아침에도 ‘기(氣)찬’ 영암엔 초대형 흰 파도가 밀려와 월출산 중턱과 온 읍내를 가득 메웠다. 삼호 바다까지 100리길인데 어찌 파도가…. 영암 활성산 풍력 발전 단지 마저 곧 점령당할 듯하고 ‘남한의 금강산’ 월출산 자락까지 위험하다. 하지만 운무는 비경을 연출하기 위한 실루엣일 뿐. 햇빛이 퍼지자 화려한 그림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천황봉 바로 옆 월출산 큰바위얼굴은 태양과 시선이 마주치자 쓰나미 같은 운무를 썰물 처럼 걷어냈다.



백두대간 자락이 남해 바다에 기세를 양보하며 몸을 낮춰 평야를 만들어 줬는데, 월출산이 불쑥 솟고 돌들이 앞다퉈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면서, 남도의 공기와 증기는 반드시 월출산에 한동안 머물러야 한다. 변화무쌍 일기이지만, 일조량은 어느 곳 보다 풍부하다. ‘신령스런 바위’라는 뜻의 영암(靈巖)에 기(氣)가 충만한 이유이다.

고산의 주름도 월출산의 ‘반전 매력’에 확 펴지고, 2016년 초여름 여행객들은 ‘대박!’ 환성을 지른다. 고산의 150년 후배 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아침에 운무가 걷히면서 월출산의 장쾌한 풍광이 깨어나는 모습을 ‘화승조천(火昇朝天:아침 하늘 불꽃같은 기상)으로 극찬하기도 했다.

월출산을 흔히 달이 뜨는 산이라고 하지만, 이것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학예사들은 ‘빼어난 곳 중 빼어난 곳’ 즉 ‘넘을 월’를 쓴 ‘월출(越出)’의 의미가 중첩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영암읍 개신리 천황야영장에 주차한뒤 말오줌떼, 사스레피나무, 노간주나무, 산대나무 등 희귀식물의 환영 속에 숲으로 접어들면 천황사를 100여m 앞두고 오른쪽 바람폭포길과 왼쪽 천황사쪽으로 나뉘는데, 가파른 바람폭포길보다는 천황사길을 택했다.

평지에서 불쑥 솟아오른 월출산 답게 천황사에서 오르는 길도 가파르다. 1시간반 가량 걸어 구름다리에 오르자 운무로 장관을 이루더니, 영암군청 박종민 주사의 부인께서 서울여행객을 위해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신 도시락을 먹는 사이 화승조천의 기운과 함께 운무가 후퇴했다.

월출산은 제주 백록담과 우도, 설악산 권금성과 덕유산을 제치고 한국관광공사가 몇 해전 추천한 한국 명소 100선의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천 개의 바위가 빼어남을 자랑하고 만 개의 골짜기가 유려한 흐름을 자랑하는 곳이다. 서쪽에 있는 도갑사는 해탈문(국보 50호), 마애여래좌상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동시에 3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사자봉 왼쪽 산 중턱 계곡에는 폭포수가 무려 일곱 차례나 연거푸 떨어지는 칠지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월출은 일본 아스카문명의 시조인 백제 왕인박사와 신라말 예언가이자 풍수지리 창시자인 도선국사를 낳았다. 세기의 사상가 두 명이 영암 출신이다. 정약용이 잠시나마 과학기술, 지방행정 거버넌스를 연구개발하고 명필가 한석봉이 수학했다. 미술가 하정웅, 국민가수 하춘화, 국수 조훈현이 나서 예술과 재능을 연마한 곳이다.

왕인박사의 고향 구림마을에 있는 상대포는 왕인박사가 405년에 일본으로 떠난 곳이다. 매년 일본인들이 방문해 참배한다. 왕인은 일본천황의 초청을 받아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함께 일본으로 간 기술자들을 통해 문명을 전했다.

구림마을의 동쪽 왕인박사 유적지는 일본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유적지 정문인 백제문을 들어서면 일본에서 헌정한 왕인정화비가 있다. 마을 내에는 전통기와집과 오래된 정자들, 정겨운 흙 담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 같다. 월출산 북쪽의 모정마을은 월출산과 호수가 빚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모습이다. 1600년대 평산 신씨, 광산 김씨가 모여 생성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모든 집 담벼락에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름 월출의 백미는 청정옥수가 빚어낸 계곡형 자연풀장 기(氣)찬랜드이다. 월출산 자락의 깨금(거문고의 보조악기)바위와 용추폭포(높이 40m) 등을 거친 물이 평지로 내려오면서 기찬랜드로 이어지는데, 자연 하천에 안전과 편의를 위한 인공구조물을 덧붙여 길다란 풀장으로 조성한 곳이다. 한 번에 수천명이 물놀이를 즐기지만, 자연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늘 깨끗하다.

기찬랜드에는 약수터와 국수 풀장, 하춘화노래비, 친환경농업교육관, 가야금산조기념관, 기(氣)건강센터, 기(氣)찬 동산 등 놀고 배우는 에듀테인먼트 시설이 즐비하다. 환경부로부터 삼림욕 건강산책로로 인증받은 기(氣)찬묏길이 이어진다.

영암의 흙도 영험한 구석이 있다. 영암에서 상용되고 있는 도기의 재료 황토는 인체에 무해한 미생물이 풍부하게 살아있어 생명의 흙이라고 불린다. 탄생-발전 시기로는 신석기 토기와 고대말~중세 청자-백자-옹기의 가운데 시점이지만, 황토의 독특한 매력과 강도로 지금도 도자기를 능가하는 인기를 끄는 영암 도기 역시, 신이 영암에 준 선물을 사람이 지혜롭게 이용한 상징물이다.

일본 오요도구 다이니혼정 신사에는 왕인을 신(一本松明神)으로 모신다. 대입을 앞둔 일본 수험생 학부모들이 앞다퉈 찾는 곳이다. 서거정, 이율곡, 정약용 등 수많은 문인과 석학들도 영암 월출 칭송 대열에 가담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 처럼, 영암의 수려한 웰빙환경 속에서 단련된 신체와 건강이 시대를 지탱하는 학문과 사상, 문화예술을 꽃피운 것이다. 올 여름에는 여기에 ‘기(氣)찬 바캉스’까지 도모한다. 영암의 지혜, 그 끝은 어디인가. 


함영훈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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