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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왜 구의역 김군에게 ‘미안하다’ 말하는가
[HOOC=이정아 기자] 지난달 28일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뒤 사고 현장인 구의역 9-4 플랫폼에는 20~30대 청년들의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플랫폼 벽뿐만 아니라 관할 구청에서 마련한 별도의 벽 판에도 추모와 분노의 메시지로 빼곡하게 들어차고 있습니다. 헤럴드 뉴미디어 HOOC은 지난 2~3일 추모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잇 1000여 장을 촬영한 후, 문자화했습니다.

그런데 분석 결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추모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미안하다’였습니다. 특히 ‘미안하다’는 편지에는 ‘나 역시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불안과 울분이 섞여 있었습니다. 기성세대의 무능과 기만에 냉소적이었던 청년들이 추모 포스트잇에 ‘미안하다’는 말을 꾹꾹 눌러담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헤럴드의 뉴미디어 HOOC은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포스트잇을 모두 촬영한 후, 문자화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추모 글 다음으로 가장 많았던 단어는 '미안하다'였습니다.

▶‘(외면해서) 미안합니다’=스크린도어 정비 중 정비노동자 사망사고는 2015년 11월 강남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날 이후 ‘2인 1조’ 작업규정이 마련됐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이 죽었습니다. 피해자 김군은 누군가의 열아홉 살 아들이었고, 그의 작업가방 속에는 아직 먹지 못한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그의 목숨마저 하청 용역 비정규직이었습니다.

미래를 볼모로 잡힌 김군이 스크린도어와 열차 사이로 내몰려진 사이, ‘운이 좋았던’ 청년들이 선택한 건 환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흙수저론’, ‘헬조선’ 등 자조적인 목소리가 되풀이돼 왔습니다. 이런 말들에는 아무리 ‘노오력’해도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조소가 담겨있습니다. 청년들은 분노하면서도 SNS상에선 좋아요를 누르면서 마음의 빚을 떨쳐냈습니다. 바뀌지 않는 사회 구조를 탓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추모 포스트잇 속 ‘미안하다’는 말이 ‘외면해서 미안하다’로 읽혔습니다. 과거에는 애도 자체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면 이제는 추모 속 공감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 것이죠. 청년들은 추모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내가, 혹은 나의 친구, 나의 동생이 피해자일 수 있었다고 되새겼습니다. 추모 현장을 찾고, 추모 포스트잇에 미안한 감정을 전하면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은 우리라는 의식을 갖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문가들은 미안하다는 말에는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고 분석합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김군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건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려는 몸짓”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비록 초보적인 단계의 시민의식이지만, 청년들이 연대 의식을 표출하며 고인에 대한 편치 못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이 되어버린 추모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런데 추모 포스트잇 한 장으로 마음의 빚을 덜어내선 안됩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죽어가기 전에 비정규직에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청년노동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노동자 사망사고의 배경은 ‘메피아’(서울메트로+마피아)였습니다. 하청 정비업체인 은성PSD가 원청인 서울메트로의 퇴직 임직원을 특별 대우로 채용하느라 저임금과 인력부족을 초래했고, 이것이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서울메트로와 은성PSD의 계약서에는 ‘메트로 전적자 38명을 고용승계할 것’ ‘1인당 월급여는 메트로의 80% 수준을 지급할 것’ 등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낙하산으로 내려온 서울메트로 퇴직자들은 월 422만 원의 급여를 챙긴 반면, 김군과 같은 비정규직 정비노동자는 144만 원의 박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게다가 서울메트로 퇴직자 다수는 은성PSD 임원으로 일했습니다. 스크린도어 수리 인력은 비정규직의 몫이였죠. 은성PSD는 스크린도어 수리 인력으로 125명을 책정했지만, 실제로 현장에 투입한 인력은 87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고에 응당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김군이 2인1조로 안전하게 근무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비겁했습니다.

구의역 추모 물결이 슬픔을 애도하는 공간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이 절망적이라 해서 냉소하고 외면하는 것이 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헬조선’에서도 희망을 축조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청년들이 늘어나야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수백여 장의 ‘미안하다’는 추모글 사이에서 기자의 눈에 띈 포스트잇은 오히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겠다’는 편지였습니다.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이제 화가 난다고 말할거야. 더 이상 너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끝까지 싸울게. 너와 같은 열아홉 살 친구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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