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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5. 굿바이 산티아고!…추억이 된 33일간의 순례길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꼼꼼히 짐을 챙긴다. 아픈 다리를 의지하던 스틱 한 짝도 배낭에 매단다. 이걸 다시 사용할 일이 있을까? 케이가 여분으로 가져와 빌려주었던 싸구려 장갑은 이미 구멍이 났다.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은 배낭 깊숙한 곳에 넣어 까미노 기념품으로 소중히 간직될 것이다. 걷는 동안 배낭에 넣어두던 여권과 비상금을 넣은 복대를 꺼내 두른다. 이제는 여행자 모드다.
침낭을 개는데 어제 알베르게에서 이야기를 나눈 알바니아 순례자들이 어깨를 두드린다. 팔에 문신이 한 가득인 건장한 남자와 그의 발랄한 여자친구다. “부엔 까미노! 굿럭!”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남자의 시선이 잠깐 흔들린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순례자에서 민간인으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 둘 알베르게를 떠난다. 씻으러 갔던 케이가 돌아오고 우리도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선다. 두고 가는 물건이 있는지 살핀다는 핑계로 마지막 알베르게를 돌아본다. 삐걱거리던 침대, 순례자들의 땀냄새조차 그리울 것 같다.


공립알베르게에 근처에 산티아고로 떠나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어제 다시 만났던 카린과 프랑스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낯선 여자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금방 그들이 탈 버스가 온다. 먼저 떠나는 카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린다. 힘껏 안아주고 뒤돌아서니, 초면인 프랑스 여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허그를 하며 내 등을 두드려 준다. 내 표정도 그 두 여자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긴 걸음과 그 걸음의 끝을 이 순간 공유한다. 힘들었고 아팠고 즐거웠고 감격스러웠던 까미노를 걸었던 순례자로서의 연대감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다. “부엔까미노!”라는 까미노의 인사를 남기고 두 여자를 태운 버스는 피스테라에서 먼저 떠나간다.
먹먹해진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하루까가 나타나고 곧이어 산티아고행 8시 30분 버스도 도착한다. 겨우 다섯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가 피스테라를 떠난다. 맨 뒷좌석에 셋이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동안 말없이 창밖만 본다. 꽤 맑은 아침이었는데 빗방울이 차창에 사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는 자주 멈춰서 손님들을 태우고 그 사이 하루까는 아예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잔다. 내 바람막이를 덮어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면서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센다.


산티아고에서 여기까지 사흘간 빗속을 헤치며 걸었던 길이 창밖에서 젖고 있다. 걸어서 사흘이 걸린 거리인데, 완행 버스로 천천히 가도 세 시간이면 도착한다는 게 왠지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썬팅된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풍경은, 걸으며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걸음에 익숙해진 발이 버스 위에 붕 떠있는 것도 겸연쩍다. 걷지 않는 발바닥이 시위라도 하는 듯 당장 쿡쿡 쑤셔온다. 어제 걸어온 길과 오늘 버스로 되돌아가는 길은 방향만 반대일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다.
3개월 전에 시작한 여행길에서 38시간의 인도 기차, 고지대를 오르내리는 24시간짜리 남미의 버스를 견디면서 내공을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까미노에 오기 바로 전까지는 무엇이든 못 견딜 게 없었다. 그러나 33일간의 걸음은 버스로의 이동 자체를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속력을 내는 버스가 어색한 것이다.
“걷기”는 과정의 중요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방법이다. 세상의 작은 것, 가까이 있는 것들과 교감하고 하늘, 들판, 숲과 같은 자연을 천천히 조망할 수 있었다. 길, 하늘, 새, 구름, 꽃, 풀, 나무, 동물, 사람, 공감과 같은 단어들과 친구가 된다. 반면 기계동력을 아용한 이동은 역시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어떻게 가는가 보다는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 그 목적이 최상의 위치에 놓인다. 그래서 여정은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남는다. 풍경은 보인다기보다 지나가버린다. 목적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진짜 걸음이 시작된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버스는 산티아고 터미널에 도착한다. 하루까가 타고 갈 코임브라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 후 출발이다. 근처의 까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로 요기를 한다.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등록을 할 때마다 “꼬레아?” 소리에 당황하던 하루까의 얼굴이 떠오른다. 외모도 그렇지만, 까미노에 유달리 한국인 순례자가 많고 게다가 한국인들과 함께 다니니까 그런 오해를 받았다. 하루까가 그녀의 아이폰을 꺼내 셀카 한 장을 찍는다. 레온에서 출발하던 그녀의 첫 걸음, 어제 피스테라의 알베르게 앞, 이 까페에서의 사진에는 모두 하루까, 케이, 내가 초췌한 얼굴로 웃고 있다. 모든 게 추억의 한 장이 되고 있다.
하루까는 코임브라로 가서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케이와 나는 일단 포르투갈의 포르투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사나흘 쉬며 여행한 뒤 케이와 나도 헤어지게 될 것이다. 함께 걷던 길, 바라보던 풍경, 서로를 위해 만들어 준 따뜻한 음식,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나누던 이야기, 웃음들은 까미노를 떠올릴 때마다 그리운 단골 메뉴가 될 것이다.
하루까가 타고 갈 국제버스가 온다. 레온과 폰페라다에서 헤어질 때처럼 두 팔을 벌려 서로를 안는다. 그녀를 태운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 나간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남은 날들이 “부엔 까미노”이길 진심으로 빌어준다.


하루까를 보내고 터미널에서 나오니 그런대로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와 있다. 버스를 탈 때까지 남은 시간 동안 산티아고 대성당 근처로 간다. 구시가는 나흘 전 비 오던 일요일과는 다른 분위기다. 대성당 앞 오브도라이도 광장에는 관광객도 많고 순례자들도 보인다. 인포메이션에 들러 지도를 받아 성당과 구시가지를 돌아본다. 기념품 가게들을 들락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산티아고 대학교 앞이다. 산티아고를 떠나는 마당에 멋진 정식이라도 먹을까 했지만 케이가 자꾸 우기는 바람에 버거킹으로 들어간다. 산티아고와 버거킹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오랜만에 먹는 햄버거는 솔직히 맛이 좋다. 까미노가 끝나자마자 인스턴트의 세계로 바로 발을 디디게 된다고 한탄(?)을 하며 감자칩까지 다 먹어치운다. 기념품 몇 개를 사고 산티아고 우체국을 찾아 레온에서 부쳐놓은 내 짐을 찾는다. 배낭도 처음처럼 불룩해진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을 향해 다시 걷는다. 멀쩡하던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비가 제법 쏟아진다. 갈리시아 지방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이제 적응이 되었다. 잠시 비를 피해보다가, 그냥 비를 맞으며 걷기로 한다. 아직 까미노의 열기가 식지 않은 우리에게 이만큼의 비, 이 정도의 걸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덕분에 시간이 빠듯하게 터미널에 도착해서 좌석에 자리를 잡고 나니 버스는 곧바로 출발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까미노데산티아고에서 발을 뗀다. 까미노를 완주한 순례자들은 쉽게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해안도시 비고(Vigo)에서 하차해서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Porto)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스페인 국경을 넘는 마음 한 구석이 찡하다. 걷지 않아도 되는 내일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 걱정될 정도로 생각보다 빠르게 포르투에 도착한다. 낯선 도시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것도 일사천리다. 오늘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까미노에서의 긴 걸음과 짐의 무게에 지쳤던 발바닥이 내내 욱신거린다.
하루에 세 대의 버스를 타고 네 개의 도시를 지나왔다. 길이 끝나면 다른 길이 시작된다는 말그대로 까미노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여행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길은 늘 거기에 있었다. 그 길을 걸었을 뿐인데, 그곳에서의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이 나에게는 별세계가 되었다.
까미노에서의 격정의 시간들이 당장 여행을 시시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삶은 계속될 것이고 여행 또한 그러리라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하던 노란 화살표가 그리울 테지만 남은 여행도, 더 많이 남은 삶의 길도 조금은 더 잘 걸어갈 용기가 생겼다.
어느 길을 걷더라도 거기서 만나는 삶의 순례자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부엔까미노(Buen Camino)”라는 영혼의 인사를 건넬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당신과 나의 길들이 안녕하기를….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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