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 “차라리 지인들과 단절”
등산·스크린골프, 나홀로 활동
현실 동떨어진 판결 내릴까 걱정
“사람 만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이대로 고립되는 건 아닌가….”
‘법조 게이트’ 사태로 번진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구명로비 논란은 결국 사법부를 향한 국민 불신만 키운 꼴이 됐다. 정 대표의 브로커로부터 로비를 받은 서울중앙지법 임모 부장판사가 의혹 제기 5일 만에 사표를 제출할 만큼 여론의 압박은 여느 때보다 거셌다.
동시에 법원 판사들도 이번 사건으로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동료 판사의 사의와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의 체포 등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법원은 정신없는 2주일을 보냈다.
판사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원 밖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법관 경력 25년차의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는 “그동안 우리 판사들 사이에서도 외부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더 이상 어려워진 것 같다”고 털어놨다.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도 “아무나 만나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 말이 나올까봐 누군가와 약속잡는 것이 꺼려진다”고 했다. 대부분 이번 사건으로 ‘스스로를 더욱 철저히 단속하게 됐다’고 하지만 ‘이러다가 세상물정 모르는 판사가 되는 건 아닌가’하는 위기감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방에서 청탁…거절하다보니 혼자더라”=판사들을 비롯한 법조인들은 ‘사건과 관련해 한번만 만나달라’거나 ‘선처를 부탁한다’는 등 각종 청탁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번 임모 부장판사도 평소 알던 사람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나갔다가 정 대표 관련 구명로비를 받고 논란에 휘말렸다. 이처럼 판사들은 언제 어디서 예상치 못한 로비를 받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A 부장판사는 “연수원 시절 교수님이 ‘판사 오래하다 보면 친구들 사라진다’고 그랬다. 지금에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했다. 연수원 동기끼리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가졌지만 동기가 하나 둘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모임에도 안나가고 동기들 전화도 안받는다는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의 B 부장판사는 “(손으로 역피라미드를 그리며) 법관 생활을 오래할수록 인간관계가 이렇게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실 판사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들 목적이 있다”며 오랜만에 연락해오는 친구들의 전화조차 경계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사람 대신 책으로 달래보지만…”=사람 만나기를 꺼리고 바깥 활동이 줄어들수록 판사들은 더욱 고립된다. 이들에게 딱히 취미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게 현실이다.
현재 수도권 지역의 법원장으로 있는 28년차 C 법관은 “과거 친구들과 골프 약속이 잡혔을 때 내가 맡은 사건 관련인이 나올까봐 사전에 참석자 정보를 물은 적이 있다. 그랬다가 오히려 친구들의 원성만 들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그는 취미로 즐기던 골프도 자연스레 멀어졌다고 했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판사들은 대부분 취미활동 대신 육아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혹은 집에서 책을 보는 것이 사회 현실을 읽는 유일한 수단이다. B 부장판사는 “사람 만나기가 어려우니 차선책으로 책을 읽지만 책 속의 지식이 생생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A 부장판사는 골프채를 놓고 등산을 취미로 갖게 됐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혼자할 수 있는 거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세상물정 모르는 판사가 될 것인가=그럼에도 판사들에게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는 주문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특히 국민 감정에 어긋나거나 사회현실과 괴리된 판결이 나올 때마다 판사들은 늘 이러한 비판에 시달렸다.
C 법원장도 “법관들이 그저 정제된 기록만 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라며 속내를 밝혔다.
재경지법 D 판사는 “판사들이 세상물정 모르고 판결 내린다고 비판이 많은데 또 외부 사람을 만나면 쓸데없는 오해를 부르니 참 처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E 판사는 “사건 내용이 어려운 재판을 할 경우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런데 사적으로는 만날 수 없으니 법정에 불러서 듣는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세상과 소통하며 견문을 넓혀야 하는 판사들은 오히려 세상과 단절된 아이러니한 현실에 처해 있다.
한 부장판사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판결이란 결국 남의 이야기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거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 판사가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다.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 세상의 이야기를 반영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
양대근ㆍ김현일ㆍ고도예 기자/joz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