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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대한민국에서 판사로 산다는 것
“결국 내 취미는 등산이 됐다. 혼자하는 거니까”

얼마 전 재경지법 한 부장판사는 취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20여년째 판사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혹시나 본인이 맡게 될 사건의 관련 인물과 엮일까봐 그 흔한 술자리, 식사모임에도 나가지 않을 뿐더러 지인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나가는 주말 골프는 엄두도 못낸다고 했다. 연수원 동기들과 정기적인 모임도 가졌지만 그 중 한 명이 변호사로 개업해 나가는 순간 전화도 안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나씩 포기해가면서 찾은 취미가 바로 혼자 하는 등산이라는 것이다.

최근 도마 위에 오른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구명 로비’ 논란 역시 한 식사자리에서 시작됐다. 정 대표의 지인 이모 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서울중앙지법 임모 부장판사와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정 대표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임 부장판사는 100억 원대 해외 원정도박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정 대표의 항소심 첫 재판장이었다.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정 대표는 항소심에서 어떻게든 감형 내지 집행유예를 받아내기 위해 옥중에서 구명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 부장판사는 식사 다음 날 법원에 재판부 재배당을 요청했고, 재판부는 바뀌었다. 결국 다른 재판장이 맡게 된 2심에서 정 대표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보석마저 기각됐다.

임 부장판사가 발 빠르게 조치한 듯하지만 여론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급기야 검찰은 조만간 브로커 역할을 한 이 씨를 불러 사건 청탁에 관한 의혹을 조사할 모양이다.

정 대표의 변호사 폭행으로 시작된 이번 사건은 변호사의 고액 수임료 논란과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되는 전관예우로까지 번졌다.

판사들은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심판해야 하는 만큼 세상과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임 부장판사처럼 불공정 논란을 피하기 위해 더욱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오랜 판사 생활로 주변 사람들을 쳐내고 홀로 등산을 한다는 부장판사의 말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현일 기자/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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