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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형 고민했지만…” 가출팸 소녀에 내린 판사의 선처
지시받고 소녀들 감시폭행
“죄질나쁘다 판단했지만
앞으론 절대 이런일 말길”
재판부, 가족품으로 돌려보내



“사실 형량에 대해 우리 재판부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404호 법정. 재판장이 주문을 읽어내려가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피고인석에는 가출한 여자 청소년들을 모아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세 명의 20대 남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A(21ㆍ여)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1월 남자친구의 제안으로 조직에 발을 들인 A 씨는 가출 청소년들과 원룸에서 공동생활하며 성매매를 한 ‘가출팸’의 일원이었다.

A 씨는 조직 운영자의 지시를 받아 여자 청소년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곁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A 씨가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잦아졌다. 사소한 이유로 자신보다 5~6살 어린 여자 청소년을 손찌검하고 플라스틱 빗자루로 팔과 허벅지를 수차례 때렸다. 담뱃불로 발등을 지지는 등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폭행으로 건강이 악화된 피해 청소년이 성매매를 못하게 되자 식사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채 감금하기도 했다. 결국 A 씨의 가혹행위로 피해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정수리가 찢어지는 상해를 입었다.

중감금치상 혐의로 구속기소된 A 씨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날 수 있었다. 성매매를 알선하고 강요한 남성들은 징역 5~7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검사의 항소로 이들은 4개월 만에 다시 법의 심판대 앞에 섰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합의9부(부장 황한식)는 남성들에게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마지막 A 씨의 차례가 됐다.

황한식 부장판사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피해자를 감금하고 폭행한 혐의를 봤을 때 죄질이 악하기 때문에 다른 두 피고인들처럼 실형을 선고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황 부장판사의 말에 A 씨는 물론 방청석에서 애타는 심정으로 재판을 지켜보던 A 씨의 어머니도 두 손을 꽉 부여 잡았다.

황 부장판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본인도 성매매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고, 당시 아직 스무살도 채 넘기지 않은 미성년자이었던 점을 감안했습니다. A 씨에 대한 검사의 항소를 기각합니다.”

사실 A 씨 역시 가해자이기 전에 억압된 상황에서 성매매를 해온 피해자였다. A 씨와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여성들은 하루에 4회로 정해진 성매매 횟수를 반드시 채워야 했다. 성매매를 하고 받은 돈의 절반 이상은 조직 운영자들 손에 들어갔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부족한 돈은 자비로 메워야 했다. 생리나 질병 때문에 성매매를 하루 쉬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운영자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면서 감금, 폭행한 A 씨의 죄질은 나쁘지만 그 역시 미성년 성매매 피해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황 부장판사는 “검정고시 준비 잘하고,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말고 잘 살길 바란다”는 충고와 함께 A 씨를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냈다.

재판이 끝나고 A 씨의 눈길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방청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였다. 좁은 방에서 가출 청소년들과 지내며 6개월간 지옥 같은 생활을 한 A 씨는 어머니와 함께 그렇게 조용히 법정을 나섰다.

김현일ㆍ이은지 기자/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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