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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이 된 음주문화] 성희롱 ‘안주’ 삼는 대학가…수십년 술 안깨는 ‘주폭 선배’
‘19금’ 넘나드는 술자리 게임에
술 취하면 후배 괴롭히는 선배
‘대학에선 뭐든 허용될 수 있다’
일탈을 ‘혜택·특권’ 여기는 착각
뿌리깊은 수직적·강압적 술문화
군대문화 고스란히 반영 시각도


#1. 대학 4학년생 고모(24ㆍ여) 씨는 최근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대학 술문화의 폐혜를 똑똑히 경험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선배 A(28) 씨는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술을 마시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대학가에서 강압적, 수직적 술문화는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 아니 예전보다 집단적인 폭력의 행태로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게임에서 성희롱을 안주 삼는 씁쓸한 대학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온라인에 뜬 한 대학생의 하소연.

 뒤늦게 술자리를 찾은 고 씨는 모두 피하고 남은 자리에 앉느라 A 씨와 동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술이 오른 A 씨는 같은 테이블에서 고 씨의 동기 B(25) 씨를 상대로 계속 시비를 걸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날따라 술에 취한 B 씨도 평소 괴롭힘을 당한 것에 대한 화가 폭발해 A 씨의 뺨을 한대 때리고 말았다.

이에 A 씨가 병을 들고 휘둘러 말리려는 사람들은 큰 곤욕을 치렀다. 단골집 주인 아주머니도 A 씨와 B 씨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이 일로 고 씨의 학과생들은 서먹서먹하다.

고 씨는 “정작 문제의 당사자인 A 씨는 다른 술자리에 가서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사회에서도 주폭 처벌을 강화한다 말이 많은데 왜 대학만 이렇게 관대한지 생각만 하면 화가 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2. 서울시내 4년제 대학에 다니는 공모(24ㆍ여) 씨는 학과에서 주최하는 술자리만 생각하면 공포부터 몰려온다. 요즘 유행하는 ‘산넘어 산’이란 술자리 게임 때문이다. 함께 술을 마실 때 앞사람이 한 행동을 다음 사람이 똑같이 따라해야하며, 따라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야 한다.

그렇다 보니 앞사람은 뒷사람이 따라하지 못할만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최근 다녀온 MT에서 공 씨는 일명 ‘19금’으로 불리는 성적인 행동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공 씨보다 두 차례 앞선 여자 선배가 남자 후배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며 ‘패스(Pass)’를 외친 것이다. 순서대로라면 해당 남자 선배가 공 씨에게 똑같은 행동을 해야하는 것. 남자 선배가 술을 마시며 게임은 일단락됐지만 공 씨는 너무나도 불쾌했다. 당시에도 인상을 찌푸리며 티를 냈지만 해당 여선배는 “재밌잖아. 설마 진짜 하겠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공 씨는 “이런 게임이 바로 ‘성희롱’이며, 접촉을 당한 남자 선배도 성희롱의 피해자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세대보다 변화에 민감한 20대들이 모인 대학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 1년이 멀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30년전과 비교했을 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강압적이고 수직적인 술 문화다. 때론 성(性)문제의 현장이 되고 마는 술자리의 모습만은 변화하지 않은 채 학번과 상관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4일 대한보건협회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대학생 사망사고는 지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총 22건이 발생했다. 학번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권한다는 이유만으로 체질과 상관없이 무조건 마시다보니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일부 학과에 따라선 욕설과 폭언, 성적 농담을 넘어 얼차려까지 자연스럽게 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문제의 원인에 대해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과거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군대 문화가 대학 내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며 “여기에 초ㆍ중ㆍ고 내내 입시 위주 교육을 받던 학생들이 민주 시민의 덕목을 키우는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하기 때문에 문제는 심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병희 서울대 교수는 “다같이 마시고 죽자는 술문화는 아직 부족한 ‘사회 민주화’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부터 내려오던 집단주의나 권위주의 문화가 아직 대학 내에 상당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했다.

최근엔 성적인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은 술문화가 심화되는 것도 문제다.
여대생 임모(26ㆍ여) 씨는 “서로 팔을 두르거나 포옹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는 일명 ‘러브샷’은 이미 구식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요즘은 여학생이 남학생의 무릎 위에 앉아서 마시는 것을 비롯해 남ㆍ여 학생의 쇄골에 부은 술을 다른 사람이 마시거나 입에 머금은 술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직접 전해주는 등의 행동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성희롱ㆍ성폭력과 관련된 대학 내 사건은 최근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고려대와 여성가족부가 공동으로 대학 성희롱ㆍ성폭력 상담교사 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1년에 2.48건의 성문제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2012년 인권위 조사에서 나타난 1.18건에 비해 2배 정도 늘어난 수치다. 고려대 양성평등센터 관계자는 “대학교 내 성폭력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자체 조사결과 대부분의 성희롱, 성폭행 사건이 음주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김수한 고려대 교수는 “강압적인 술자리는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게 되는 일종의 관행”이라며 “학생들에게 대학이란 곳에선 뭐든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술에 취해 심각한 일탈까지 벌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생에게 일탈을 하나의 혜택과 특권처럼 부여했던 착각에서 문제가 시작됐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신동윤 기자/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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