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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 기자의 일본열전] 일본인 억류와 ‘자기 책임론’의 악몽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 세상을 소란스럽게 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의) 자유를 위해 전력을 다한 일본 정부와 각국 정부, 무사 석방을 기원해주신 국민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 부모가 고개숙여 인사했다. 자식이 잘못해서 고개 숙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식들의 죽임이 일으킨 ‘소동’에 대해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테러리스트에 의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것보다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과가 우선이었다. 분쟁지역으로 갔다가 피랍돼 국가에 “민폐”를 끼쳤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겐지다” 열풍을 일으킨 일본 언론인 고토 겐지와 함께 참수 당한 유카와 하루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나마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라며 묵묵하게 죽음을 맞이한 고토는 일본에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됐다. 하지만 유카와 하루나에게 사람들은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이들은 유카와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며 “애초에 간 것이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자료=NHK방송]

일본 ‘자기 책임론’의 디스토피아가 재현되고 있다. 17일 NHK 방송이 시리아 알카에다계 무장단체에 억류된 야스다 준페이 프리랜서 기자의 영상을 공개하면서 인터넷 상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주장의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야스다 준페이는 지난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억류됐다 풀려난 일본인 3명 중 한 명이었다. ‘자기 책임론’이 예상되는 이유다.

일본 사회를 알려면 일본어로 민폐를 뜻하는 ‘메이와쿠’를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우는 것이 ‘남에게 폐 끼치 말기’일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큰 결례다.

문제는 메이와쿠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부당대우를 받아 도움을 받을 때조차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한다.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한 할머니는 자신을 구조해준 구조대원에게 “폐를 끼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전파를 타고 쓰나미 속에서 빛난 ‘일본인 정신’으로 두고두고 소개됐다. 할머니가 재난재해가 발생했을 때 국가에게 보호받을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물론, 정부를 테러리스트의 협상테이블에 앉혔다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정부가 여행 자제령을 내린 분쟁지역을 방문한 것 역시 비난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목숨으로 죄값을 치르라”, “세금 도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은 ‘잘못’한 것일까. 분쟁에 뛰어든 이들이 없었다면 다르푸르 학살, 보스니아 내전 등 각종 민족 학살 문제는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꾸눈’ 종군 기자 고(故) 마리 콜빈도, ‘수단의 슈바이처’ 고(故) 이태석 신부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최대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개념으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다. 지난해 고토와 유카와가 피랍됐을 때 아베 총리의 발언대로 국가 최고의 책임을 국민 생명과 안전 보호에 있다. 테러리스트가 요구한대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협상을 지속하고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역할이다.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NYT)는 피랍자들을 둘러싼 일본 정부를 비롯한 사회를 향해 “일본 ‘자기 책임론’은 국민을 국가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고 정부가 국민보다 우위에 있다고 바라보는 ‘오카미’(お上ㆍ일본왕실이나 정부를 지칭하는 높여 부르는 말)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비난했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랍된 일본인 3명(야스다 포함)이 풀러났을 때 일본 내각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하라”고 지적했다.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 신문은 피랍자들에게 “정부가 지불한 몸값을 청구하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7월 국제 언론인 단체인 국경없는 기자단(RSF)는 야스다가 시리아 무장단체에 억류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때 아베 내각은 “확인된 정보가 없다”고 일축했다. 지난해 12월 RSF가 또다시 “야스다가 무장단체에 억류됐고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일본 정부는 “여기저기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RSF는 얼마 안가 “사실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았다”며 주장을 철회했다. 스가 야스히로 관방장관은 지난 17일 밤 영상 속 인물이 야스다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영상을 공개한 시리아 남성은 “무장단체가 4개월 간 일본과 접촉을 시도했으며, 일본이 몸값을 지불할 의사를 보이지 않아 영상을 공개했다”고 일본 언론에 밝혔다. 일본 정부는 야스다 준페이라는 한 국민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책임을 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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