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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광장] 포퓰리즘의 시대 - 정용덕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용어는 그것이 발전하게 된 특정 사회의 맥락을 감안하지 않은 채 다른 사회로 전이되는 경우에 변질되기 마련이다. 최근 우리 학계의 ‘국가’, ‘국민’, ‘문명’ 등에 대한 개념사(槪念史) 연구가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언젠가 분석돼야할 대상 목록에 포퓰리즘(populism)도 포함시켰으면 한다. 적잖이 오해가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미국의 한 민간연구소는 최근의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 지식인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자 소식지를 보내왔다. 대선 과정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주류 전통과는 크게 다른 이데올로기를 내건 트럼프(Donald Trump)와 샌더스(Bernie Sanders)의 예상 밖 선전이 계기다. 그런데 미국 지식인들이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그들은 이 두 예비후보가 주류 정당과 직업정치인들로부터 소외된 일부 유권자들의 선호를 대변하면서 그들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19세기 말 정책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들의 이익보호를 명분으로 ‘포퓰리스트 운동(Populist Movement)’을 이끌었던 인민당(People‘s Party)의 역사적 사례를 상기시킨다. 기존의 정치체제가 유권자들의 선호를 고르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초래되는 것으로,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이 염려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유럽과 남미에서도 심심찮게 회자 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주로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지도자가 정당과 의회 같은 매개 조직들을 우회하면서 소외계층과 직접 소통하여 지지를 끌어내고 그것을 확산시켜 사회변동를 꾀하는 정치행태로 이해된다. 유럽의 파시스트(Fasist)와 남미의 페론주의(Peronism)가 전형적인 역사적 사례다. 전자의 경우 우파의 전형이지만, 상황에 따라 우왕좌왕했던 남미에서 보듯이 포퓰리즘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일관성 있게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북미와 남미 그리고 유럽의 경우는 포퓰리즘을 대의제민주주의가 민의(民意)를 고르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병리현상인 것으로 진단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 해법으로 기존의 기득권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보수성 타파 및 개방성 강화를 제시하는 점도 마찬가지다. 소외된 유권자들의 선호가 고르게 국정에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포퓰리즘을 방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내달에 있을 20대 총선을 앞두고 포퓰리즘 단어가 자주 언론 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 포퓰리즘 개념은 그 말이 생겨난 서양과는 사뭇 다르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정책을 공약하고 실행한다는 의미지만, ‘부화뇌동’한다는 식의 부정적 함의가 짙게 배어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개념 정의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설마 공직자들이 유권자의 뜻에 따라 정책을 수행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포퓰리즘이 ‘인민(people)’을 의미하는 라틴어 ‘populus’에서 유래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포퓰리즘 자체는 문제시 하지 않는 것이 서양 학자들의 시각이다.

유권자들의 요구라지만 그것이 유권자 가운데 단지 일부일 뿐 전체의 선호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퓰리즘 전통이 루소(Rousseau)의 ‘일반의지(general will)’ 개념에 연계된 것으로 보는 서양 학자들의 시각과는 정반대 해석이 된다. 게다가 소수의 선호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인가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결국 포퓰리즘의 문제는 공직자들이 유권자 요구에 따라 정책을 공약하고 시행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정책의 목적, 실현가능성, 그리고 결과 간의 인과관계가 모호한지 여부에서 찾는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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