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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무새 죽이기’ 은둔의 작가 하퍼 리…그가 남긴 7가지 비밀

저작권료+부대수입=430억…대부분 기부
대학중퇴·조울증·고향·‘봉인된 입’…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하퍼 리 히스토리



인종차별 등 ‘편견’을 파고들어 퓰리처상까지 받은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의 작가 하퍼 리(Harper Lee)가 지난달 19일 별세했다. 향년 89세다. 그가 떠나도 작품 인기는 여전하다. 1960년에 출간, 56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학생들 필독서로 여겨진다.

판매부수도 엄청나다. 40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4000만부 이상 팔렸다. 미국ㆍ영국 의회도서관 조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된 이유다. 20세기 최고의 소설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이렇듯 ‘앵무새 죽이기’의 명성은 널리 퍼졌어도 정작 작가의 삶은 작품 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소설 한 편으로 천문학적 수입을 올렸지만, 번 돈 상당부분은 남을 돕는 데 썼다. 세상의 이목을 피해 은둔생활을 한 작가는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헤럴드경제 자매 매체 슈퍼리치가 하퍼리의 비밀 7가지를 분석했다.

하퍼 리 [사진=바이오그래피닷컴]

① 검소한 억만장자, 작품 수입 사용처는 ‘빨래방(?)’과 기부

하퍼 리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미국잡지 ‘뉴요커’에 따르면 그가 앵무새 죽이기의 저작권료로 번 돈(2010년 기준)만 우리 돈 최소 10억 원에 달한다. 기타 부대수입을 모두 합치면 430억원 정도다. 소설 하나로 사실상 억만장자 대열에 오른 것.

하퍼 리는 과연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을까.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집에 세탁기도 없었던 그는 용돈 상당부분을 세탁소 등 빨래 서비스(?)에 썼다고 한다. 

하퍼 리 [사진=피비에스]

없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퍼 리의 집엔 에어컨ㆍ컴퓨터가 없었다. 휴대폰도 없었다. 편지나 글을 쓸 땐 수동 타자기를 썼다.

그의 엄청난 작품수입의 상당액은 고향의 감리교회와 자선사업에 꾸준히 돈을 써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은둔 작가’란 명성에 걸맞게 자신의 유명세나 선행이 조명받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정확한 기부활동 및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암암리에 내놓은 금액은 작품수입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②대학 중퇴 후 소설가의 길로

미국 앨라배마 주(州) 먼로빌에서 태어난 그는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했다. 사회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여학생 동아리와 학교 출판부 등에서 활동했다. 특히 유머 잡지 ‘래머재머(The Rammer Jammer)’의 편집자로 일하며 글쓰기에 소질을 보였다.

1961년 고향 먼로빌에서 찍은 하퍼 리 젊은 시절 [출처=히스토리닷컴]

그는 재학 중 영국 옥스포드 대학으로 1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문학가의 꿈을 굳혔다. 1950년엔 결국 법학 전공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동부항공사(Eastern Airlines)와 영국해외항공의 표판매원으로 일하던 도중 브로드웨이의 작곡가 겸 극작가 마이클 마틴 브라운을 만났다. 브라운을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일을 그만두고 출판기획사 모리스 크레인(Maurice Crain)에 들어가 ‘앵무새 죽이기’를 완성했다.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곧잘 어울리긴 했지만 사실 하퍼 리는 고독을 즐기는 개인주의자였다. 대학 시절에도 옷이나 화장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성교제에도 시들했다. 오로지 학업과 글쓰기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는 문학 우등생 단체와 합창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③모전여전(?)…되물림 된 조울증

하퍼 리의 남다른 성격엔 이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넬레(하퍼 리의 본명)는 늘 방어적인 아이였어요. ‘앵무새 죽이기’는 확실히 넬레의 어린시절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책이란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죠.”

2010년 한 잡지 인터뷰에서 하퍼 리의 오랜 이웃 존스가 이렇게 밝혔다. 그는 “사실 하퍼 리의 엄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에겐 끔찍한 공포와 불행이 될 수 있었죠. 누군가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면 넬레는 바위처럼 딱딱한 얼굴로 쏘아보다가 마구 욕을 퍼붓기도 했어요”라고 덧붙였다.

하퍼 리의 지인들도 친모 프란시스에 대해 비슷한 증언을 한다.

“언젠가 프란시스가 두 번이나 넬레를 욕조에 넣고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일까. 어린시절의 하퍼 리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누구든 폭력으로 응수하는 공격적인 아이였다. 평생을 시달려야 했던 우울증과 심한 변덕은 다름아닌 그의 유전적 요인으로 보인다.


④카포티와의 인연, 소울메이트(?)에서 원수로…

그러나 하퍼 리에게도 마음을 나눌 만 한 친구는 있었다. 바로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로 유명한 작가 트루먼 카포티다. 그는 하퍼 리의 고향 지기였다.

남자아이처럼 거칠었던 하퍼 리는 감성적이고 예민한 카포티의 보호자로 나서곤 했다. 카포티는 부모에게 버려진 뒤 친척에게서 자랐다. 완전히 다른 성향에도 불운한 유년시절의 기억은 이들을 긴밀한 관계로 엮었다.

성인이 돼서도 친구를 감싸는 하퍼 리의 역할은 이어졌다.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 일하던 카포티의 조수로 나선 것. 특히 범죄수사물을 구상 중인 그를 도와 한 살인사건 진상 조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의 도움으로 카포티는 걸작 ‘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인 콜드 블러드’ 작가 트루먼 카포티(왼쪽)와 함께 한 하퍼 리 [출처=스코츠맨]

하지만 둘 사이가 계속 좋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카포티의 작품이 성공했지만 하퍼 리에겐 어떠한 공도 돌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카포티는 자신의 전기(傳記)에서 하퍼 리와 그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욕조 질식 사건’ 등도 공개했다.

하퍼 리는 더이상 카포티와 친구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둘은 완전히 갈라섰다.

한때 카포티와 염문설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⑤고향 먼로빌에 유명세를 가져다주다

먼로빌(Monroeville). 그녀가 태어난 곳이자 작품의 배경이자 잠든 곳이다. 하퍼 리의 문학적 영향으로 유명세를 탄 이 조용한 도시는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 줬다.

하퍼 리는 몇년간 뉴욕서 타향생활을 하면서도 가족을 보기 위해 먼로빌을 자주 찾았다. 언니 앨리스는 아버지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또 다른 언니 루이스도 멀지 않은 곳에서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다. 낚시와 오리, 거위에게 먹이를 주고 맥도날드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겼다.

하퍼 리의 고향 먼로빌. 주민들이 하퍼 리가 죽기 전 집필한 신작 ‘파수꾼’을 응원하기 위한 표지판을 세워놨다.

먼로빌은 ‘앵무새 죽이기’ 속 가상 도시 ‘메이콤(Maycomb)’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의 실제 집은 소설에 등장하는 법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다. 오늘날 매년 3만 명 가량의 팬들이 매이콤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이 오래된 법원은 현재 작가 트루먼 카포티와 하퍼 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930년대 풍을 그대로 복원해 먼로빌의 명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⑥은둔 작가의 ‘봉인된 입(sealed lips)’

‘앵무새 죽이기’ 출판기념일인 2010년 7월 11일, 먼로빌은 수천 명의 하퍼 리 ‘팬클럽’ 인파로 북적였다. 그러나 하퍼 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떤 자리에서도 그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지난 50여년간 ‘은둔작가’로 불린 이유다.

이 별명은 ‘앵무새 죽이기’의 성공과 함께 붙여지기 시작했다. 늘 비밀리에 움직이며 대중 앞에 서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식석상 자리였던 2007년, 대통령상을 받기 위해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 앞에 섰을 때도 하퍼 리는 어떤 대답이나 연설도 하지 않았다.

세계 유수의 대학들에서 명예 학위를 받을 때도 언제나 수상소감은 사양했다.


⑦영화배우 직접섭외에 나서기도

하지만 하퍼 리가 침묵만 지키는 작가는 아니었다. 소설 출간 직후 영화화가 결정된 ‘앵무새 죽이기’의 남자 주인공 섭외엔 직접 팔을 걷어붙이기도 했다.

애초 그는 주인공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역을 아카데미ㆍ골든 글러브ㆍ칸 영화제를 휩쓴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1900∼1967)가 맡기를 바랐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 포스터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레고리 팩(1916∼2003)이 적임자로 결정났다. 결국 이 영화로 그레고리 팩은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하퍼 리는 아끼던 아버지의 회중 시계에 자신과 팩의 이름을 새겨 선물했다. 2003년 팩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도 둘은 친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한편, ‘앵무새 죽이기’가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재탄생 한다는 소식을 얼마 전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그레고리 팩을 잇는 또 한 명의 페르소나가 탄생할 예정이다. 하늘에서도 하퍼 리의 적극적인 캐스팅(?)이 빛을 발할 지. 두고 볼 일이다.


윤현종 기자ㆍ김세리 인턴기자/seri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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