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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정적한마디]모순, “직권상정” 그리고 “필리버스터”
[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때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자랑하기를 “이 창은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다. 그리고 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창이나 칼로도 꿰뚫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한 구경꾼이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모순(矛盾ㆍ창과 방패)’의 설화다.

흔히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베타적 존재론의성격이 더 강하다.

실생활에서 모순의 예시를 확인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회에서 모순의 설화에 완벽히 들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임시회 제7차 본회의가 정족수 부족으로 개회되지 못하자 원유철 새누리당 대표가 의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mook@herladcorp.com

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심사기일 지정)’ 결정과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그에 대항해 꺼낸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그것이다.

북한의 도발과 국내외 테러 위협 증가를 ‘비상사태’로 인식한 정 의장의 직권상정 결정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이다.

직권상정 앞에서 ‘상임위원회 통과’와 ‘본회의 상정’이라는 장벽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여당이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 상황에서 테러방지법의 표결 통과는 그저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이다.

반면 필리버스터는 ‘막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방패’다.

의회 다수파의 독주를 막고자 만들어진 필리버스터는 상대적 약자인 야당에 ‘무제한 토론’이라는 무기를 준다.

끊임없이 발언과 수정안 제출을 반복, 원치 않는 의사 진행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1957년 스트롬 서먼드 미 상원의원은 의회에 상정된 민권법안 반대를 위해 24시간 8분 동안 연설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김용남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필리버스터는 직권상정과 맞지 않다. 안보 비상사태에 대한 인식과 무제한 토론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당과 야당이 모든 정치혐오와 국회공전의 원인을 서로에게 돌리는 상황이 결국, ‘있을 수 없는’ 상황을 현실로 끌어낸 셈이다.

그러나 21세기판 모순 설화에서는 창이 부러지든, 방패가 구멍나든 결국 승자가 결정 날 테다. 그것이 정치니까.

과연 끝내 이겨 이 설화의 결말을 다시 쓰는 것은 여당의 창일까 야당의 방패일까.
yesye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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