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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곡 전문 번역가 성수정 “한국 연극계에 자극을 주고 싶어요”
[헤럴드경제=신수정 기자] 올해 영국, 미국에서 들여온 연극들이 거센 열풍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매진 행렬을 기록한 ‘카포네 트릴로지’, ‘차이메리카’, ‘폭스파인더’ 등은 희곡 전문 번역가 성수정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성수정 번역가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소재로 삼은 ‘인코그니토’를 비롯해 영화 ‘검은 사제들’의 히로인 박소담이 출연하는 연극 ‘렛미인’, 극단 산수유의 신작 ‘하퍼 리건’ 등의 개막도 앞두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영미(英美) 희곡 번역에 몰두해온 성 번역가는 “한국 연극에 자극이 되는 작품들을 계속 소개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안훈 기자 rosedale@heraldcorp.com]

▶시간, 공간을 갖고 극단적으로 놀아본 작품=“제가 모르는 대본이 있으면 안돼요”

성 번역가는 한달에 40~60여편 가량 영국의 연극 대본을 사서 본다. 이가운데 직접 극장에서 보고싶은 작품이 10편을 넘으면 영국으로 날아간다. 영국행 비행기를 타는 횟수는 1년에 한번에서 6개월에 한번, 3개월에 한번으로 점점 잦아지고 있다.

성 번역가는 극단으로부터 의뢰받은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지만, 먼저 극단이나 연출가들에게 괜찮은 작품을 소개하기도 한다. ‘인코그니토’도 성 번역가가 양정웅 연출에게 먼저 제안한 작품이다.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별무리’의 작가 닉 페인의 신작이다.

‘인코그니토’는 크게 세가지 이야기로 구성된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갖고 도망치는 아인슈타인의 부검의사 하비, 30초밖에 기억을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 여성 임상 신경심리학자 마사의 이야기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다시 31개 장면으로 쪼개진다. 1953년 영국(헨리), 1955년 미국(하비), 2013년 영국(마사)으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다르지만 시간의 흐름대로 진행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있다. 배우 4명이 등장인물 21명을 나눠서 연기한다.

“예를들어 남윤호 배우는 30대 마이클로 나오다 다음 장면에서 80대 할아버지 헨리가 되요. 장면이 31개나 되니까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의상이나 무대장치를 바꿀 수는 없어요. 빈 무대에서 같은 의상을 입고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죠. 배우들에게 굉장한 부담스러운 작품이예요. 닉 페인이란 젊은 작가가 무대 위에서 시간, 공간을 갖고 극단적으로 놀아본 거 같아요.”

천재 작가로 불리는 닉 페인은 지난해 서른살의 나이에 이 작품을 썼다. 세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다. 불가의 ‘인연(因緣)’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세 이야기는 극중 앤소니의 대사처럼 새들처럼 모였다 흩어져요. 삶이 그렇잖아요.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어떤 대형을 만들었다 흩어지죠. 이 과정을 보면서 나 자신은 물론 어떤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아인슈타인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복잡한 과학이야기가 아닌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기억상실이란 자아가 없어지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없어지는 거죠.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요. 이런 내용을 담은 대사들이 너무 좋아요”

번역을 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렸던 성 번역가는 얼마전 배우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통곡을 했다. 옆에서 함께 연습을 지켜보던 양 연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별무리보다 더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어요. ‘별무리’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였지만 ‘인코그니토’는 다양한 인물이 나와서 훨씬 울림이 커요. ‘인코그니토’는 내년 미국 맨해튼씨어터클럽에서 재공연할 예정인데 아마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할 거예요. 제이크 질렌할이 닉 페인의 팬이거든요”

[사진=안훈 기자 rosedale@heraldcorp.com]

▶버는 돈은 대본 사는 데 다 써=성수정 번역가는 1996년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에서 연극 담당 기자를 맡으며 연극에 빠졌다.

“인터넷 신문이 없을 때라 뉴욕타임스 일주일치를 모아놓고 봤어요.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 죽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회사에서 막 울었죠. 부장과 선배들이 ‘쟤 왜 저래’ 그랬어요.”

그는 연극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2000년에 사표를 냈다. 배고픈 연극판에 뛰어들기 전 KBS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2년간 돈을 모았다. 2002년 연극 ‘거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희곡 전문 번역가로 나서게 된다. 성 번역가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희곡만 전문으로 번역한다.

그는 영국에서 신작이 나왔다고 하면 무조건 대본을 사들인다. 초연에 이어 재공연을 하면 재공연 대본까지 구매한다. 특히 번역할 대본을 쓴 작가의 작품은 모조리 찾아서 읽어본다.

“버는 돈을 대본 사는 데 다 써요. 지난해 번역했던 ‘엔론’은 대본만 7개 샀어요. 작가가 수정할 때마다 번호를 매겼는데 제가 최종 번역한 대본이 24-2였죠. 제가 생각해도 저는 연극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때 동시통역을 했던 경험을 살려 희곡을 번역할 때는 빠른 속도로 한다.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초벌 번역본을 갖고 배우들과 연습을 하면서 다듬어나간다.

“예를들어 ‘인코그니토’에 ‘chance favors the prepared mind’라는 말이 나오는데 직역하면 ‘기회는 준비된 마음을 선호한다’예요. 이걸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고 바꾸는 거죠. 배우가 직접 말로 하다보면 번역해놓은 글과 달라지는 게 많아요”

성 번역가는 번역극을 소개하면서 행여 한국 젊은 작가들의 기회를 뺏는 것은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의 좋은 작품을 들여와 이들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인코그니토’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닉 페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같지만 절대 아니예요. 닉 페인은 영국 국립극장 안에 있는 서점에서 대본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곳에서 수많은 대본을 보고 자란거죠.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도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성 번역가의 꿈은 언젠가 박근형의 ‘청춘예찬’을 비롯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연극의 본고장 영국에 소개하는 것이다.

ss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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