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볼거리 많아 국내외 관광객 급증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간 후 교황의 발길이 닿았던 곳에는 국내외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해미읍성, 솔뫼성지 등에는 교황 사진으로 만든 입간판, 교황 동상 등을 세워놓아 교황 방한 당시 기쁨과 감동이 다시금 느껴졌다.
충남 서산시에 위치한 해미읍성에서는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가 열렸다. 당시 6000여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해미읍성에서 교황을 맞았을 정도로 드넓은 장소다.
솔뫼성지 안에 있는 교황 동상. |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7년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 성벽 높이 5m, 둘레 1.8㎞에 달하는 성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공원같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주(公州)’, ‘이(李)아무개’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공주에서 온 사람들이 성벽을 쌓았고, 책임자는 ‘이아무개’라는 뜻이다. 이같은 실명제는 60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성벽이 튼튼하게 유지되 온 비결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드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평온한 장소지만 과거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기에는 천주교인들이 해미읍성 안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다. 해미읍성 안에는 유독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있는 나무가 하나 있다. 천주교인들이 매달려서 고문을 받았던 회화나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희생된 순교자들을 등불(호야)에 빗대 이 나무를 호야나무라고 부른다.
교황 방문지로 뜨기 전 해미읍성을 방문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11년 이곳에서 10개월 간 군관으로 근무했다. 천주교를 믿었던 정약용 역시 이곳에서 짧은 유배생활을 했다.
해미읍성에서 돗자리짜는 할아버지 모습 |
일제 강점기에 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해미읍성 안에 땅들을 민간인들이 헐값에 사들였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90여가구가 해미읍성 안에 살았다고 한다. 현재 해미읍성 내부 곳곳에 민가나 주막 등을 재현해놨다. 할머니들의 다듬이질이나 할아버지가 돗자리를 짜는 모습 등을 구경하고 짚풀공예, 활쏘기 등 각종 체험도 할 수 있다.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청허정 주변에는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새긴 장승들이 줄지어 서있다. 대통령들의 얼굴은 근엄하기보다 친근하다. 한 조각가가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쓰러진 소나무들을 모아다가 장승들을 만들어놨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당진시 솔뫼성지 역시 1년 새 관광객이 3배 가량 늘었다. 솔뫼는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으로 실제 솔뫼 성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돼 있다. 소나무 숲 안에서는 어느 성당에서 단체로 찾아온 순례객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솔뫼성지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복원해놨는데, 이곳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도했던 모습이 동상으로 만들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온갖 고난을 견디고 25살에 사제가 되지만 1년만에 26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솔뫼성지에서 차로 10~20분 거리에 합덕성당, 신리성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10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신념을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은 끊임없이 이곳을 찾고 있다.
서산ㆍ당진=글ㆍ사진 신수정 기자/ss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