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혜(31)는 2013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입단하자마자 주역을 꿰찬 젊은 소리꾼이다. 그는 지난해말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정은혜 컴퍼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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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국립극장］ |
정은혜는 국립창극단 입단 전부터 현대 무용가 안은미, 영화 ‘암살’ 음악감독인 장영규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 여름 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재즈 가수 나윤선은 운전하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정은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차를 세웠을 정도다. 올해 나윤선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정은혜와 핀란드 피아니스트 이로 란탈라의 협연 무대를 기획했다.
미술작가 정은영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동아시아 페미니즘:판타시아전’에서 정은혜의 소리가 담긴 영상을 선보이고 있다.
이처럼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고 판소리를 무용,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접목해왔던 정은혜가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무대에 선다. 지난 30년간 중견 명창들이 공력을 뽐내왔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정은혜는 4시간 20분 길이의 ‘심청가’를 완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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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국립극장］ |
▶30대 소리꾼, 여덟번째 완창 도전=7살에 소리를 시작한 정은혜는 18살 때 ‘춘향가’로 처음 완창에 도전했다. 이후 다섯바탕을 모두 완창했다. 그는 오는 31일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여덟번째 완창에 나선다.
“2008년 ‘심청가’ 완창 전에는 체력을 기르려고 한달 간 매일 아침 등산을 했어요. 혼자 서서 소리를 해야 하니까 체력을 안배하는 것이 관건이예요. 창극단 경험이 더해졌으니 이전에 비해 표현력이 더 가미될 것이라 생각해요”
정은혜는 최승희 명창으로부터 이어받은 강산제 ‘심청가’를 선보인다. 근대 5대 명창으로 꼽히는 정정렬의 소리는 제자인 김여란 명창-최승희 명창-정은혜로 이어져오고 있다.
“최승희 선생님의 특징이 배어있어 다른 ‘심청가’에 비해 야질자질해요. 섬세하고 수식이 화려하죠. 여성 소리꾼이 ‘심청가’를 부른다고 하면 슬프고 애타는 느낌이 듬뿍 담겨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제 목소리 특성상 비장함을 더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간 심청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은혜는 심봉사가 “너를 팔아 눈을 뜨면 무엇하리”라고 하는 대목을 예로 들며 툭툭 와닿는 부분들이 있다고 말한다.
“심봉사가 곽씨부인에게 ‘우리가 사는대로 살아가되 자식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서 이야기가 시작해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하는 인간의 보편성이 담겨있죠.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고전의 깊이란 이런 거구나라고 느껴져요”
북을 치는 고수는 두시간마다 교체되지만 소리꾼은 4시간 20분 동안 혼자 등장인물들을 연기하고 해설자 역할도 한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다.
“완창을 듣는 관객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서 끝나면 항상 관객들께 큰절을 해요. 9살짜리가 제 완창을 듣고 ‘재미있어요’라고 한 적도 있어요. 원래 판소리는 저잣거리같이 열린 공간에서 했잖아요. 한시간 소리 듣고 나가서 남산 산책하고 다시 소리 들으러 오셔도 되요. 물론 제가 소리를 잘하면 객석에 꼼짝없이 앉아 계실테니 잘 해야죠”
뭐하러 힘들게 완창을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리꾼이 한대목을 멋지게 들려줘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정렬 선생님께서는 25년간 독공하셨는데 제가 어찌 그 소리를 따라가겠어요.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고 그 당시와 속도가 다르잖아요. 그 때처럼 연마할 수 없는 여건이니 스스로 채찍질하고 반성하기 위한 것이예요. 최승희 선생님께서는 김명환 고수와 6시간 30분 동안 쉬지않고 ‘춘향가’를 녹음하신 적이 있어요. 세상에 이렇게 집요한 예술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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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극 ‘단테의 신곡’에서 열연 중인 정은혜 |
▶장래희망은 세계적인 소리꾼=그가 국립창극단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입단원이지만 ‘메디아’ 등에서 주역을 맡으며 호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취업이 안 되서 난리인데 ‘정신 나갔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편안한 직장에서 주어진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있었지만 ‘정체돼 있다’는 위기감도 느꼈죠”
‘정은혜 컴퍼니’는 정은혜가 직접 음악 공연을 기획하고 소리를 들려주는 놀이터다. ‘정은혜 컴퍼니’의 첫 활동은 올해 파리 여름 축제였다. 정은혜는 2013년 프랑스 파리 여름 축제 당시 오전 6시에 흰 한복을 입고 세느강변에서 소리를 들려줬다. 관객 1000여명이 동이 터오는 새벽에 들려오는 신비한 소리에 빠져들었다. 파리 여름 축제 측의 초청으로 올해는 판소리와 함께 아시아 민요들을 들려줬다. 지난 20일에는 해외문화홍보원 주최로 열리는 이집트, 쿠웨이트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 출국했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해외 관객들도 한번 들으면 정말 좋아해요. 뉴질랜드 할머니도, 아프리카인도 눈물을 흘렸어요. 선입견을 배제하고 알맹이를 보면 더 잘 볼 수 있잖아요. 한국 관객들께서도 판소리를 어렵다고 여기지 말고 더 많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초등학생이 장래희망을 써 내듯 그는 ‘세계적인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늘 이야기한다.
“지금은 ‘세계를 떠도는 소리꾼’이지만 그것도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안은미, 장영규 선생님과 실험적인 작품을 하면서 판소리가 현대적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외국 피아니스트와 협연하면서 판소리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앞으로도 세계 어느 무대에서건 제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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