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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압’ 벗은 페미니즘, 유희로 태어나다
여성 퍼포먼스 ‘댄싱마마’展
13명 작가 영상·사진 30여점 전시
안은미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등
저항·선정적 제스처 아닌
희망·역동성을 유쾌하게 표현



1970년대 페미니즘 미술운동을 이끈 1세대 여류 작가들의 신체 퍼포먼스가 대개 그러했다. 빗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나체가 될 때까지 가위로 옷을 찢어 발기고(오노 요코), 거꾸로 매달려 피를 뚝뚝 흘리는(이불), 여성 신체를 스스로 학대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 사회에 도전했었다.

여성주의는 어느 순간 여성 작가들로부터도 외면받기 시작했고, 사이버 공간에서는 ‘페미X’ 같은 여성 혐오 표현의 어근(語根)으로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멜라니 보나요, <가구와 결합된 신체, 릴리>, 디지털 C프린트, 96×120㎝, 2008 [사진제공=Courtesy of Melanie Bonajo and Akinci]

페미니즘 미술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맞이한 듯 보인다. 특히 2010년 이후 페미니즘 미술에서 신체는 여전히 주요한 매체로 이야기의 중심에 내세워지고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분히 프로파간다적이고 저항적인 여성주의를 넘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맥락을 짚은 전시가 코리아나미술관(서울 강남구 언주로)에서 열린다. 미술관이 하반기 기획전으로 마련한 ‘댄싱마마(Dancing Mama)’다. ‘억압’이 아닌 ‘유희’의 코드로 페미니즘 미술을 읽을 수 있는 세계 여성 작가 13명의 사진, 영상 30여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다.

전시 타이틀은 참여 작가인 무용가 안은미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Dancing Grandmothers)’에서 차용했다. 전국을 일주하며 시장, 미장원, 정류장, 마을회관 등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즉흥 몸짓을 촬영하고 이를 안무로 되짚은 작업이다. 신나는 타악 소리에 맞춰 벌어지는 할머니들의 춤판은 희망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축제의 장이다. 전시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1층에서 상영되는 터키 작가 인치 에비너(Inci Eviner)의 7분 30초짜리 영상 ‘런어웨이 걸즈(Runaway Girls)’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초현실적인 오브제와 드로잉이 놓여진 공간을 360도 무빙 카메라로 훑는 가운데 성별이 모호한 인물들이 춤을 추거나 몸부림 치는 내용이다.

폐경을 생산성 상실이 아닌 성역할로부터의 초월로 그린 한국 작가 홍이현숙의 사진, 영상 시리즈도 진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전시장 분위기는 농담처럼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여성 신체라는 소재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한 페미니즘 미술의 과도기적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독일 작가 클라우디아 라인하르트(Claudia Reinhardt)의 사진 6점에서부터 표현의 강도가 세진다. 사라 케인, 잉게보르그 바흐만, 피에르 몰리니에르, 다이언 알버스 등 자살로 삶을 마감한 여성 예술가들의 죽음을 작가가 퍼포먼스로 기록한 사진들이다.

전시장 지하에서는 더 센 ‘19금’ 작품들이 에너지를 뿜어낸다.

포크레인이 대지를 파헤치는 한 가운데 나체로 서 있는(레지나 호세 갈린도 ‘대지’)가 하면, 페인트로 물들인 성기를 드러내 놓는(멜라니 보나요 ‘Genital Panic’) 퍼포먼스 영상도 있다. 특히 ‘Genital Panic’은 1968년 발리 엑스포트(Valie Export)가 선보였던 동명의 퍼포먼스를 네덜란드 작가 보나요가 2012년 드아펠아트센터에서 재현한 작품이다.

남성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도 있다. 바하마 출신의 미국작가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는 온 몸에 꿀을 바른 근육질의 남성이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나체로 유영하는 모습을 14분짜리 영상에 담았다. 타자로써의 남성을 배척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내는 공간으로 모성적인 육체를 그렸다.

코리아나미술관 측은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 미술은 억압에서 유희로 코드를 달리하고 있다”며 “여성 신체 내부로부터 나온 고유의 언어를 통해 여성 내ㆍ외연의 다양한 차원들을 이야기할 때”라고 전시 의의를 설명했다.

전시는 8일부터 12월 5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3000원, 초ㆍ중ㆍ고 학생 2000원.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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