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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민낯-승정원일기 33]서얼은 양반이 아니던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얼(庶孼)이 바로 그들이다. 서는 양첩(良妾)의 자식, 얼(孼)은 천첩(賤妾)의 자식이다. 그들은 양반 사족의 자손이면서도 단지 어머니가 첩이라는 이유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서얼의 과거 응시를 금지한 서얼금고법은 태종 15년(1415)에 서선(徐選) 등이 “서얼 자손은 현직(顯職)에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적자와 서자를 분별하소서.”라고 건의한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서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으며, 단지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에서는 “서얼 자손은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여기서도 자손은 아들과 손자로 한정했고, 증손부터는 서얼의 과거 응시를 허용했다. 그런데 명종 10년(1555)에 간행된 《경국대전주해》에서는 자손을 자자손손으로 규정하여 서얼의 과거 응시를 전면 금지했다. 이는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킨 유자광(柳子光)이 서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서얼의 과거 금지는 조선시대 내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다. 서얼들은 서얼금고법을 철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때로는 많은 사람이 연명으로 상소해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숙종 21년(1695)에 영남의 서얼 남극정(南極井) 등 988명이 올린 상소, 영조 즉위년(1724)에 정진교(鄭震僑) 등 5000명이 올린 상소, 순조 23년(1823)에 유생 김희용(金熙鏞) 등 9996명이 올린 상소 등이 있다.

영조는 말년에 서얼의 관직 진출 허용과 관련해 큰 획을 긋는 하교를 했다. 서얼에게 청직(淸職)과 현직(顯職)을 허용하고, 서얼 여귀주(呂龜周) 등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하도록 한 것이다. 영조 48년(1772) 8월 15일, 서얼의 관직 진출을 금한 것은 유자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이후로는 절대로 구애받지 말고 건국 초기의 풍속을 보존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호부호형(呼父呼兄)할 수 있게 하라고 하교한다.

영조는 자신의 업적 여섯 가지 중 다섯 번째로 서중(敍衆)을 꼽았다. 이는 서얼을 청직(淸職)에 임용하게 하는 조처를 가리킨다. 역대 임금들은 대체로 서얼 차별을 폐지하는 정책을 옹호하려고 노력했으나, 서얼 허통이 노력한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조정에서 아무리 정책을 만들어 시행한다 하더라도 몇 백 년을 이어 온 사회적 관습을 타파하는 데에는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다.

강대걸(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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