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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왕실]쿠데타 15번에도…권력은 더 커진 국왕
지난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프라윳 찬오차 당시 태국 육군 참모총장이 잉락 친나왓 총리 정부를 몰아내고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국왕의 쿠데타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국왕의 승인이 없으면 쿠테타 성공의 마지막 조건이다.

프라윳 장군 중심의 군부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집권 이후(2001년) 그를 지지하고 있던 도시빈민ㆍ농민 계층(레드셔츠, 탁신계)과 중산층ㆍ엘리트 세력(옐로우셔츠, 반탁신계)간의 대립 사이에서 친나왓 정권의 부패와 정치ㆍ경제 안정 등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2006년 태국 군부 쿠데타 당시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과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들. [사진=위키피디아]

군부는 중산층ㆍ엘리트 세력을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쿠데타 승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지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절차다.

1932년 개헌 이후 태국에서는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푸미폰 국왕 재위기간 중에만 15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재위 중 첫 쿠데타는 1947년 11월의 군부 쿠데타다. 문민정부가 물러나고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 때부터 쿠데타는 태국 정권교체의 한 방식이 되었다.

푸미폰 국왕은 재위기간 4번의 섭정(대리청정) 체제를 거쳤다. 이 중 2번이 군부 섭정이다. 총리 및 육군 장성이었던 싸릿 타나랏(1957~1963), 타넘 끼띠카쫀(1963~1973)이 집권했다.

싸릿은 1957년 피분 송클람 정권의 부정선거를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3년 병으로 사망할때까지 권력을 행사했다.

1963년 타넘이 권력을 승계했지만 정치계파간 갈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했다. 그는 1971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폐지하고 국회를 해산,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그러나 1973년 민주화를 열망한 학생혁명으로 타넘정권이 퇴진하고 과도 민간내각이 구성돼 1975년 총선거에서 연립내각이 집권했다. 하지만 연립정부의 통치력 약화와 정부의 좌경화 경향 등을 이유로 1976년에 다시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한다.

1980년엔 총리가 된 쁘렘 띤술라이 집권기간인 1981년, 1985년 2차례의 쿠데타가 시도됐지만 푸미폰 국왕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 때문에 “기수(총리)는 바뀌지만 마주(왕)는 영원하다”는 쁘렘 전 총리의 말은 태국 국왕의 정치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1년 쑨턴 콩쏨퐁 태국군 최고사령관의 의회해산과 계엄령 선포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군부 쿠데타는 한동안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 탁신 정권 퇴진 운동이 거세지며 15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비교적 쿠데타에 중립적이었던 푸미폰 국왕은 때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면서 시대 흐름을 따라가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7년 쿠데타 승인을 시작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1973년 학생혁명 당시엔 민주화를 지지하며 군부세력을 견제했다.

다만 빈번한 쿠데타와 이에따른 국왕의 역할 확대는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와 국민정서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태국에서 정치는 대중의 관심밖에 있고, 과거 신분계급이나 복종적 상하관계에 따른 국민의식도 민주정치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문

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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