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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ADERS CAFE] 알고 사랑하면 眼目이…조선大家들의 그림 그리고 畵評…
조선후기 書畵수장가 김광국의 ‘화첩’ 육필본 근거 유홍준·김채식 재현박지원·박제가등 화제·비평 꼼꼼히 기록
조선후기 書畵수장가 김광국의 ‘화첩’…육필본 근거 유홍준·김채식 재현
박지원·박제가등 화제·비평 꼼꼼히 기록
윤두서·심사정등 화가 125명 작품 가득


“갑자년(1744년)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김광수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이윽고 하늘이 바둑돌처럼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심사정이 밖에서 허둥지둥 뛰어와서 옷이 다 젖었으므로 서로 바라보면서 아연실색하였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자 온 뜨락의 풍경이 마치 미불 집안의 수묵도와 흡사하였다. 심사정이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멋지다고 소리치며 급히 종이를 찾더니, ‘와룡암소집도’를 그렸다.”(‘김광국의 석농화원’ 중)

조선후기 서화 수장가 석농 김광국이 10여년에 걸쳐 모으고 정리한 ‘석농화원’ 중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臥龍菴小集圖)’에 붙인 김광국의 화제다.

이 때가 1744년, 김광국은 18살, 현재(玄齋) 심사정은 38세, 김광국의 롤 모델이자 스승인 김광수는 46세였다. 김광국은 10대부터 서화를 감상하고 수집한 타고난 미술애호가였다.

조선시대 화가 윤두서의 ‘석공공석도’. “‘석농화원’ 육필본에 실린 화제와 화평은 그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준이 대단히 높다. 역대 화가들에 대한 품평이 대종을 이루면서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정보가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회화비평도 있다.”‘ (김광국의 석농화원’ 중)

조선시대 400년을 아우르는 방대한 회화 컬렉션을 자랑하는 ‘석농화원’(石農畵苑)은 김광국이 1797년에 죽은 뒤 흩어져 화첩의 이름과 그 일부였던 그림 수십 폭만 전해올 뿐 전모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2013년 한 경매에 육필본 ‘석농화원’이 출품돼 일대 화제가 됐다. 김광국이 화첩에 실린 그림목록과 화가이름, 그림에 덧댄 화평과 화제까지 꼼꼼히 기록한 미간행 필사본이다.

이 육필본 ‘석농화원’을 유홍준 교수와 김채식 성균관대 연구원이 우리말로 옮겨 ‘김광국의 석농화원’을 펴냈다. 원서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따르되 어려운 단어나 고사에 대한 설명은 주석으로 달고 유홍준 교수가 회화사적 의의와 가치를 상세하게 보탰다.

조선시대 화가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

원래 화첩에는 모두 267폭의 그림이 실려있었고 이름이 밝혀진 화가만 125명에 달한다. 고려말의 공민왕과 조선 초기의 안견, 석경 등을 시작으로 조선 중기의 이정, 윤두서, 동시대인 김홍도, 심사정 등이 올라있다. 화첩에는 중국 그림 37폭, 일본 그림 2폭, 서양 그림 3폭 등 외국그림도 포함됐다. 이번에 펴낸 ‘김광국의 석농화원’에는 지금까지 화첩 ‘석농화원’에 실려 있던 것으로 알려진 그림 130여점을 찾아 원래 화첩의 체제대로 구성, 원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했다.

화첩은 홍석주가 서문에 쓴 대로 ‘명화의 보고’로서 보는 맛이 있지만 화첩에 실린 서문과 발문, 비평도 읽는 즐거움을 준다. 박지원의 서문을 비롯, 조맹부, 강세황, 김광수 같은 당대 명사들이 글을 짓고 박제가, 유한지, 이한진 등이 글씨를 쓰는 등 조선을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망라됐다. 


흥미로운 점은 문장가들의 그림에 대한 시선이다. 박지원과 홍석주 등 문인들은 석농의 열렬한 그림 수집을 꽤나 기이하게 여겼던 듯하다. 일찍이 연경(북경)을 다녀오는 등 컬렉터로서 활동 반경이 넓었던 김광국은 그림만 수집한 게 아니라 직접 오래 쌓은 내공으로 그림평을 하기도 했다.

특히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을 비교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석농은 심사정의 ‘방동현재산수도’에 붙여, “겸재와 현재의 그림은 세상에서 누가 낫고 못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며, 그는 둘을 문장가에 비유했다. 겸재는 장유를 닮았고, 현재는 최립을 닮았다며 은근히 현재를 높였다.

책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당시 선비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조맹부의 제어도 묵직한 감동을 준다.

“책을 모으고 책을 소장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잘 보는 자는 마음과 생각을 맑고 단정히 가다듬고 깨끗한 책상에 향을 사르고서, 책등을 말거나 책 모서리를 꺽지 말고, 손톱으로 글자를 긁거나 침을 책장에 묻히지도 말며, 베개로 삼거나 옆구리에 끼지도 말아야 하며, 손상되면 즉시 수리하고 펴본 후에는 바로 덮어야 한다.”

화가의 인품과 그림을 한 가지로 여긴, 원명유의 ‘방예운림추산도(倣倪雲林秋山圖)’에 붙인 안호의 따뜻한 글도 눈길을 끈다.

“나는 시와 그림을 완상할 때면 늘 그 작가를 알고자 했다.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세대마다 없지 않지만, 그 사람됨이 그의 시와 그림과 닮은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유홍준 교수의 해설에 따르면, 김광국은 고조부의 선대는 양반층이었으나 무관 집안으로 낮아진 뒤, 고조부가 의관이 된 이후 대대로 의관직을 세습해 김광국도 의관을 지냈다.

김광국은 50세에 연행사신을 동행, 중국과 서양문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런 사실은 ‘석농화원’에 수록된 중국화가 김부귀의 ‘탁타도’ 와 네덜란드 동판화 ‘누각도’에 나타나 있다. 그의 연경행의 목적은 중국 의약품의 사무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년 뒤 다시 연경에 갔는데 이 때 우황 무역문제로 의적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김광국이 그림을 소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석농화원’ 열권 중 아홉번째 권인 ‘별집’의 성격 등 풀어야할 의문에도 흥미를 가질 만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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