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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앤스토리] 100만달러와 1달러 사이…아티스트 김중만
2007년 이후 돌연 상업사진과 절연 ‘나를 찾아서’…‘드라마틱한’아웃사이더를 만나다
“청담동 돌체앤가바나 매장 5층에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사진작가 김중만(61)을 처음 만난 건 최근 서울옥션 강남점에서 열린 싱가포르관광청 사진전에서였다. 싱가포르관광청과 론리플래닛코리아 등이 ‘김중만 싱가포르 자선 사진전’을 약 1주일 동안 개최했다.

전시장에 공개된 김중만의 사진 40여점은 싱가포르 가이드북에 실린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했다. 관광 홍보용으로 내놓기엔 어딘지 창백했다.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그는 온 몸에 문신이 있다. 처음에는 멋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몸에 새긴다. 태극기 문신은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신 날, 숫자 46은 천안함 사태 때, 그리고 304는 세월호 참사 때 새겼다. 박해묵 자/mook@heraldcorp.com

문득 궁금해졌다. 지난 30년 간 각종 언론 매체들이 수백번도 더 발가벗긴 이 남자,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연예인 화보, 영화 포스터 등 상업사진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 남자,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다 돌연 상업사진과 절연(絶緣)을 선언하고 숨어버린 이 남자, 김중만의 카메라는 지금 무엇을 담고 있을까. 

2009년 화제를 불러 일으킨 TV 예능 프로그램과의 인터뷰를 제외하면 그에 대한 ‘가십성’기삿거리도 뜸해졌다. 트레이드 마크 같았던 레게머리도 싹둑 잘라 버렸다. 그의 나이 이제 환갑을 넘겼다.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김중만 사진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 청담동에 있다. 김중만과 청담동.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숱한 연예인 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신 또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와 유명세를 얻었고, 그러기에 그는 셀럽들의 비즈니스 및 사교의 본거지인 청담동에 있어야 마땅했다.

이런 저런 선입견을 갖고 그를 찾았다. 한 가지 원칙은 세웠다. 그동안 김중만의 이름 석자 뒤에 따라 붙었던, 세 번의 결혼, 두 번의 해외 강제추방, 그리고 정신병원 감금, 구치소 수감과 같은 ‘드라마틱한’ 과거사를 다시 캐묻지 않겠다고. 그런 건 이제 너무 식상하니까. 다만 사진작가, 혹은 아티스트 김중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고.

▶내가 찍고 있는 것=스튜디오는 아름다웠다. 안목 높은 작가의 취향과 감각은 럭셔리한 것과 빈티지한 것을 한 데 아울렀다. 그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모아 놓은 각종 오브제들과 함께, 그가 작업하고 있는, 혹은 과거에 작업했던 흑백 풍경 사진들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 냈다. 여기에 다섯 마리 새들이 스튜디오를 새장 삼아 살고 있었다. 불청객의 등장에 소란을 피우던 새들이 인터뷰가 시작되자 이내 숨 죽인 듯 조용해졌다.

“최근 작업들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2008년부터 중랑천 뚝방길에 있는 나무를 찍는 작업과, 베트남 하롱베이부터 중국 장가계, 황산, 덕천폭포, 백두산, 서울,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풍경 시리즈 ‘이스트(East)’ 작업,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를 포착하는 ‘레드 라이트 투 세컨즈(Red light two seconds)’ 작업입니다.”

그가 상업사진이 아닌 자신만의 작품을 찍기로 한 건 2007년 이후부터다. 그는 하루 작업에 2000만원을 받는 최고의 사진가였다. 한 때 연간 15억~17억원을 벌 정도였다고 했다. 사진(Photograph)이 아닌 작품(Art piece)을 시작한 2008년, 첫 해 번 돈은 5000만원. 수입이 20분의 1로 줄었지만 그는 나만의 시간이 20배로 생겼다고 말했다.

“내 뿌리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작업을 통해 나를 찾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한국을 찍으면 찍을수록 자아가 풍성해지는 느낌이었죠.”

큰 전시도 앞두고 있다. 오는 10월 열리는 프랑스 파리 최대의 현대예술축제인 ‘백야축제(La Nuit Blanche)’에 메인 아티스트로 참가한다. 이스트 시리즈와 한복 시리즈, 뚝방길 시리즈를 선보인다. 본래 한 작가의 작품 1점만을 하루 동안 걸어놓는 걸 원칙으로 하는 이 전시에서 김중만은 주최 측의 요청으로 총 6점을 나흘 동안 선보이게 됐다.

1년에 한 번씩 자선 전시를 하겠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싱가포르 사진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가졌다. 관광청과 사전 계약 당시 자선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하고, 아니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전에 비하면 수입은 형편없어요. 사람들은 안 믿지만, 매달 월세 걱정을 하며 작업을 해요.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기쁜 일이고요. 그게 열명이든 스무명이든 규모나 숫자에 상관없이 꾸준히 한다는 게 중요하죠.”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평온해졌다고 말했다.

▶나를 찍어 온 것들=긴장을 놓는 모습이 보였다. 좀 더 사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저는 스스로 잘 생겼다거나 잘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사실 궁금해요. 저는 지금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도 그렇게 여성잡지들이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지 말예요. 아직까지도 왜 내가 그렇게 궁금할까….”

전성기 김중만의 집 앞에는 기자들이 살다시피 했다. 2009년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난 열흘 동안 CF만 무려 7~8개가 들어 왔다. 두달 정도 전화를 정지시켰을 정도. 참다 참다 레게머리도 잘랐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십미터 전방에서도 저를 알아보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요. 사진 찍으려고요. CNN 기자들과 함께 홍대에 간 적이 있었는데, 한 70~80명이 저를 잡아두고 사진을 찍는 겁니다. 기자가 제게 ‘너 대체 누구냐(Who the hell are you)’고 묻더군요.”

해외 비엔날레를 가도 기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단체로 족히 2~3시간은 묶어놓을 정도라고.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보여지는 것이 그렇다. 온 몸에는 문신이 가득하다. 꼼데가르송, 마틴마르지엘라, 앤드뮐미스터 같은 아방가르드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럭셔리한 옷을 누더기처럼 입고 다닌다. 30대의 김중만을 복기해보면, 멀쩡한 청바지에 구멍을 내 입고 다니고(훗날 이 바지는 1990년 가수 김현식이 마지막 앨범 자켓 사진을 찍을 때 입기도 했다) 귀를 뚫고 다니는, 흔치 않은 패션 감각의 소유자였다. 이는 당시 한국 시대의 고정관념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 그랬다. 김중만의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 삶은 파란만장했다. 결국 절대로 꺼내지 않으려던 질문을 에둘러 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느냐고.

“마약 때문에 정신병원에도 감금되고 구치소에도 들어갔었죠. 그런데 가장 힘들었을 때는 1985년, 그리고 6개월 뒤인 1986년 추방을 당했을 때였어요. 구치소나 정신병원은 내가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요. 그런데 추방은 말이죠. 갑자기 자신을 낯선 시간, 낯선 곳으로 몰아 넣는 거예요. 예측을 할 수가 없죠. 내 인생에서는 가장 절망스럽고 하루 하루 사는 게 힘들었던 때였어요.”

정글에서 사자를 찍기 위해 4m 앞까지 다가갔을 때에도 무섭지 않았던 그였다. 그에게 추방지는 곧 사지(死地)였다. 첫번째는 아프리카, 두번째는 미국 로스앤젤리스(LA)였다.

“LA 보그호텔에서 지냈어요. 하루 5달러 짜리 방인데, 매춘이 이뤄지는 곳이었죠. 눈 뜰 때마다 생각했어요. 어떻게 죽을까.”

추방의 이유는 프랑스 국적자가 한국에서 신고를 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두번째 추방은 타이밍이 절묘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인 배우 오수미와 살고 있었는데, 신 감독이 북한을 탈출했다는 뉴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 관계자들이 새벽에 그를 찾아 왔다. “가시죠” 말 한마디와 함께 내쫓겼다. 그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때였다.
“정상적이지 않으면 다 없애 버리는 때였으니까요.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김중만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이 나를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생각했죠.”

그를 변하게 만든 건 정신병원이었다. 구치소를 살다 나온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곧바로 마약을 끊었다. 그런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고 하루 3리터씩 피를 뽑아 갔다. 보름 동안이었다.

“8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90%는 멀쩡한 사람들이었죠. 왜 이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됐을까. 딱 하나였어요. 내일이 없어서. 내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인생의 극한까지 내몰렸던 그는 ‘자유’ 보다 ‘희망’을 보게 됐다. 그리고 꿈꾸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 돼 있었다.

▲ 김중만 작가의 작품들. [사진제공=벨벳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

▶내가 찍고 싶은 것=“동대문 전농동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아요.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 너무 좋아해요. 아주머니들이 인사할 때마다 먼저 하는 말이 ‘이사 안 가실 거죠’예요.”

카메라를 차에 두고 차창 닫는 걸 매일같이 잊어버린다는 그에게 동네 아저씨들은 “누가 가져갈지 모르니 창문 닫으라”며 걱정해 줄 정도라고.

그는 오래도록 강북에 살았다. 청담동 스튜디오도 아트 컬렉터인 건물주가 싸게 내 줘 들어올 수 있었다. 나중에는 좀더 후미진 곳으로 스튜디오를 옮길 생각이다.

연예인들이 북적대는 파티장에서 샴페인 든 모습이 어울릴 것 같은 그이지만, 실상 좋아하는 것은 사극과 ‘미드’다. 특히 미드는 마니아 수준이다. ‘타이런트(Tyrant)’, ‘더 라스트 쉽(The last ship)’, ‘트루 디텍티브(True detective)’ 같은 미드를 줄줄이 꿸 정도다. 바꿔 말하면, 작업할 때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내가 좀 더 유니크하게, 좀 더 미쳐서 살기를 바라겠지만요. 저는 극히 평범하고 단조로운 사람이에요. 또 그렇게 살고 있고요.”

그에게는 꿈이 있다. ‘백만달러(One million)’ 작가가 된 후 은퇴하는 것이다. 최근 독일갤러리에서 20점 정도 되는 이스트 시리즈를 2년 내에 10억원에 팔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스트 시리즈 같은 가로 5m가 넘는 대형 사진 작품은 전세계를 통틀어 안드레아 거스키와 김중만 정도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아티스트 김중만이 세상에 남기는 족적 같은 것이다.

“원밀리언을 하고 나면 투밀리언이 하고 싶어지는 게 욕망이죠. 유명한 대가들이 나이 70~80이 넘어서도 작업하는 걸 봤어요. 열정이 욕망으로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게 세상 끝까지 가 봐야 할 만큼 절대적인가요.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멈추려고요. 내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도달하면요. 부족하면 다음 세대가 채우면 되잖아요. 원밀리언이 됐을 때 1달러짜리 사진을 찍을 거예요. 폴라로이드 하나 들고 가족들과 여행 다니면서요.”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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