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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품 연극 뒤엔‘명품 각색가들’있다‘
프라이드’의 지이선,‘필로우맨’의 이인수,‘모든건 타이밍Ⅱ’의 문삼화·황이선…대사 속에 숨겨진 이야기 들어보니
8월은 공연계의 비수기이지만 해외 유명 극작가들의 작품으로 공연장이 붐비고 있다. 이같은 명품 연극들이 돋보이는 것은 적절한 각색 덕이다. 아무리 좋은 극본이라도 외국식 유머 등을 한국 정서에 맞게 바꾸지 않으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극 ‘프라이드’, ‘필로우맨’, ‘모든건 타이밍Ⅱ’의 원문을 섬세한 한국어로 바꾼 여성작가, 연출가들을 잇달아 만나 대사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정적 대사가 돋보이는 ‘프라이드’

연극 ‘프라이드’는 영국 작가 알렉시 캠벨의 데뷔작이다. 1958년과 2015년 현재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초연에 이어 올해 수현재씨어터에서 11월 2일까지 재공연한다.

이 작품의 각색은 연극 ‘모범생들’을 쓴 지이선 작가가 맡았다. 지 작가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거부감없이 전달하기 위해 서정적인 한국말들을 찾아냈다.

“원문에 ‘터치(touch)’, ‘클로즈(close)’라고 나온 부분을 대부분 ‘닿다’라는 한국말로 바꿨어요. ‘가깝다’라는 말보다 ‘닿다’가 더 위로해주고 토닥여주는 느낌을 들게 하죠”

한국 사람은 ‘강남’하면 척 알아듣지만 ‘마이다 베일’은 듣는 순간 물음표가 떠오른다. 이 작품에는 런던의 부촌 ‘마이다 베일’처럼 특정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생소한 지명이나 영국식 유머를 바꾸는 일도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마이다 베일부터 걸어오신 거예요”라는 대사는 ‘산책하기 좋은 밤이죠’라고 바꿨어요. ‘세르비아인이 이탈리아인인 척 하면서 요리를 만드는 이탈리아 식당’이라는 영국식 유머도 한국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웨이터 얼굴도 음식도 온통 빨간 식당’으로 바꿨죠”

또 1958년 성소수자인 올리버, 필립은 서로 존댓말을 쓰고 2015년 성소수자인 올리버, 필립은 반말을 쓰도록 했다. 슬프고 어두운 1958년과 유쾌하고 밝은 2015년의 분위기나 인물간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다.

지 작가는 무엇보다 올리버, 필립의 친구인 실비아의 대사에 공을 들였다. 실비아처럼 관객들이 성소수자들을 포용력있게 봐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실비아가 게이를 트렌드 세터나 액세서리로만 취급하는 사람들을 길게 비판하는 장면이 나와요. 한국 관객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찾다가 ‘섹스 앤 더 시티가 계집애들을 다 망쳐놨어’라고 바꿨죠. ‘섹스 앤 더 시티’는 게이가 연애 상담도 잘 들어주는 친구라는 환상을 심어줬잖아요. 실제 제 주변에 게이들은 ‘내가 연애상담 기계냐. 내가 남자를 잘 알면 나도 연애를 잘 하겠지’라고 해요.(웃음)”

이처럼 각색은 창작 못지않은 공이 들어가는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지 작가는 “각색이란 관객과의 소통, 대화에 있어 시작이 되는 매력적인 작업”이라고 정의했다.

“솔직히 원작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극작 기술을 떠나 게이인 작가의 진정성이 제 마음을 움직였죠. 너무 좋은 극본을 친구에게 이야기해준다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비단 성소수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사회적 구조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거나 소수자라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프라이드’를 가지라고 말해주는 작품입니다”



스토리텔링 코치의 지도까지…‘필로우맨’

전세계 연극계는 오는 9월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하는 ‘행맨’을 주목하고 있다. 천재작가로 불리는 마틴 맥도너가 2003년 ‘필로우맨’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이기 때문이다.

마틴 맥도너의 대표작 ‘필로우맨’은 국내에서 2007년 최민식ㆍ윤제문을 주인공으로 초연했다. 올해는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오는 30일까지 공연한다.

극중 작가인 카투리안이 지은 7가지 이야기와 이를 본딴 살인사건이 교차된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가 ‘천재작가’라는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올해는 이인수 연출이 번역, 각색, 연출을 맡았다. 앞서 2012년과 2013년 공연에서는 애니메이션, 인형 등을 통해 7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해는 오로지 주인공 네 명의 대사로만 이야기를 전달한다. 대신 관객들이 극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각색에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원문에는 카투리안의 형 마이클이 ‘엄마, 아빠를 소원의 우물에 묻고 석회를 뿌렸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석회를 뿌리는 것은 살인자의 지문 등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바로 와닿을 것 같지 않아 ‘엄마, 아빠를 소원의 우물에 묻었어’라고 고쳤다.

긴장감 넘치는 전개 속에 군데군데 등장하는 영국식 유머도 보다 친절하게 풀었다.

“카투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카투리안 K 카투리안’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어요. 영국 관객들은 빵 터지는 부분인데 한국 관객들은 가운데 이름이 생소하잖아요. 그래서 ‘카투리안 카투리안 카투리안’이라고 고쳤어요”

7가지 이야기 중 ‘작가와 작가의 형제’, ‘작은 예수’를 카투리안이 독백할 때 대사는 A4용지 2~3장에 달한다. 이 연출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최정선 스토리텔링 코치의 도움을 받았다. 최 코치는 화술 지도 전문가다.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야기하는 카투리안을 통해 관객들도 머리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말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이 있잖아요. 말 밖에 없지만 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데 초점을 뒀어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도 해설자가 나와서 장면을 길게 설명하잖아요. 잔인한 장면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는 규칙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가 주는 리듬감, 상상력이 당시 극장을 가득 채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란한 볼거리에 익숙해진 요즘 관객들도 이같은 언어의 매력에 푹 빠졌다. 2012년 공연 당시에는 ‘필로우맨’을 14번 반복해서 본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극중 죄인의 죄목이 끝까지 밝혀져지 않는 이야기 ‘사거리의 세 사형대’처럼 작품 자체도 미스터리가 많아요. 배우들과 토론하다가 오후 연습이 다 끝난 적도 있죠. 하지만 터무니없는 미스터리였다면 이렇게 사랑받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설명되면 재미없잖아요. 적절한 의문이 남아서 더 생각하게 되고 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해외 유명 극작가들의 명작들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같은 인기 뒤에는 국내 관객들의 정서에 맞게 원문을 고친 각색가들의 노고가 숨어있다. 연극‘ 필로우맨’,‘ 프라이드’,‘ 모든건 타이밍Ⅱ’의 한 장면(위부터). [사진제공=연극열전, 노네임씨어터, 공상집단 뚱딴지]

삶의 단편, 긴 여운…‘모든건 타이밍Ⅱ’

‘모든건 타이밍’은 6편의 짧고 코믹한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객석에서 신나게 웃다 나온 뒤에도 문득문득 다시 생각나게 하며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미국 작가 데이빗 아이브스의 두번째 희곡집 ‘타임 플라이즈(Time Flies)’에 수록된 에피소드들을 문삼화ㆍ황이선 연출이 번역, 각색, 연출했다. 오는 30일까지 유시어터에서 공연한다.

“에피소드 중 ‘바벨’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식으로 바꿨어요. 남의 장례식 음식을 만드는 두 여자의 이야기 ‘잔칫날’의 경우 원문에는 이름도 생소한 음식들이 나와요. 이걸 양갱, 무시루떡 등 친숙한 음식으로 바꿨죠”(문삼화)

“한국 정서에 맞게 각색을 하기도 했지만 원작 자체에도 동양적 정서가 담겨있어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등 동양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작품에 담겨있어요”(황이선)

문 연출은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잘자요 엄마’를 비롯 연출을 맡은 작품 대부분을 직접 번역해왔다.

“똑같은 한국말도 듣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잖아요. 원작자가 열어 놓은 것을 번역자가 개입해서 선택할 수도 있죠. 그래서 연출인 제가 바로 번역하는 것이 명쾌해요”(문)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했다. ‘하루살이’의 경우 하루살이를 인간의 인생에 비유하고, ‘바벨’은 하느님이 하늘에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는다. 특히 ‘그린힐’은 발 밑에 그토록 찾던 푸른 언덕이 있어도 앞만 보고 가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데이빗 아이브스의 작품은 굉장히 연극적이고 독특해요. 하지만 단순하게 연극성만 갖고 까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죠. 감각적인 코미디가 아니라 비틀어진 시각에서 나오는 코미디예요. 그런 면에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문)

신수정 기자/ss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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