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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채화 종이 위에 펼친 ‘칼’의 드로잉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전시장의 하얀색 벽면과 그 위에 걸어놓은 수채화 종이가 언뜻 보아서는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송곳으로 찍거나 얇게 포를 뜨듯 칼집을 낸 자국이 선명하다. 그냥 송곳이나 칼의 ‘흔적’일 뿐인 데 어떤 것에서는 분노의 외침이, 어떤 것에서는 절망의 눈물이, 안도의 한숨이 느껴진다.

김명남(53) 작가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1980~90년대 유화 일색의 화단에서 수채화로 주목받다 1993년 돌연 “지루해서” 프랑스로 떠났다. 이후 그리스 남자와 결혼해 한국, 프랑스, 그리스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2001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파리의 에꼴데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명남 작가의 국내 개인전이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렸다. 회화 설치작품이 30여점, 소품을 포함해 200여점의 작품이 전시장에 나왔다.

작가는 고급 수채화 종이인 아르슈(Arche)지에 송곳과 칼로 구멍을 뚫고 스크래치를 낸다.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건 녹내장을 앓으면서부터다. 그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계기는 2010년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때였다.

“나보다 나이가 두 배나 어린 작가들이 대부분이었죠. 남편이 그러더군요. 모두들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를 하는데 그림만 그려서 되겠느냐고요. 저는 생각했어요. 나라도 계속 그려야겠다. 그리고 변해야겠다.”

‘저 너머(beyondㆍ2011)’ 시리즈에서는 건축 모형에 쓰이는 손톱 크기만한 사람 미니어처를 함께 사용했는데, 최근작인 ‘하얀 묘법(Ecriture blanche)’ 시리즈에서는 이마저도 빼버렸다. 플라스틱이라는 인공의 오브제 대신 순수한 종이 그 자체만을 갖고 작업함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무한대로 확장했다. 가뜩이나 자신이 직접 만든 게 아닌 사서 붙인 오브제였던 탓에 “맘고생을 많이 했다”는 작가는 작업 내용을 바꾸면서 오히려 더 편안해졌다고 했다.

“어찌 보면 예전 작업이 더 잘 팔리는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은 못마땅했죠. 지금 작업은 사람들이 집에 걸어놓고 싶다는 생각은 덜 들게 만드는 것들이에요. 내가 편안한 작업을 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 놓았던 탓일까.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한 송곳 자국, 칼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보는 이의 감정이 화면에 투영된다.

“어떤 것은 격동하고 어떤 것은 잔잔합니다. 작품 앞에 서면 내 자신도 명상하는 느낌이 들죠. 나는 최소한의 것(흔적)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관객들이 채우기를 바라요. 내가 다 채워버리면 누가 작품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겠어요.” 
하얀 묘법(Ecriture blanche), 종이 위 혼합매체, 46×27㎝, 2015 [사진제공=신세계갤러리]
하얀 묘법(Ecriture blanche), 종이 위 혼합매체, 50×50㎝, 2015 [사진제공=신세계갤러리]
‘저 너머(Beyond)’ 세부 사진, 150×200㎝, 종이에 송곳 등, 2011 [사진제공=신세계갤러리]
‘저 너머(Beyond)’ 세부 사진, 150×200㎝, 종이에 송곳 등, 2011 [사진제공=신세계갤러리]

액자 하나 없이 세로 2m쯤 되는 수채화 종이를 주 재료로 쓰다보니 보관 방법도 까다로울 터. 그러나 정작 작가는 “둘둘 말아 보관한다”고 했다. “이게 뭐라고 고이 모셔놓나”라고도 했다. 그는 “프랑스 어느 건물에도 같은 작품을 길게 늘어뜨려 놓았는데 비바람을 맞으면서 누렇게 변해가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시간이 작품을 완성한다는 의미다.

텅 빈 백색의 화면, 제목도 ‘묘법’이다보니, 단색화와 연결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단색화가 박서보의 대표적인 작품이 ‘묘법’ 시리즈다).

“굳이 단색화나 미니멀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건 아니예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에서 물성(物性)이 사라지게 된 거죠.”

그러면서도 자신은 요즘 “이우환에게 빠져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파리에서 이우환의 전시를 보고 “붓을 꺾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그는 “한국에 있으나 프랑스에 있으나 한국인의 정신성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신세계갤러리(서울 중구 소공로 신세계백화점)에서 9월 16일까지 열리며, 부산 센텀시티에서도 8월 20일부터 9월 14일까지 볼 수 있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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