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47일간의 세계여행] 49. 지구 반대편 발파라이소…네루다의 향기가…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발파라이소(Valparaiso)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가까운 태평양 연안의 항구도시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산티아고 시외 버스터미널로 가서 발파라이소소 가는 버스표를 산다. 터미널이 생각보다 멀어 택시를 탄다. 동행들과 요금을 나누어 내서 부담스럽지는 않다. 사람 복닥거리는 터미널에서는 소매치기가 걱정되어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여행자의 쓸데없는 오해일수도 있지만 그런 긴장은 오히려 이로운 거라 생각될 만큼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다.

발파라이소 버스터미널에서 도착해서 해변과 도시 풍경을 보며 쁘랏부두(Muelle Prat)까지 걷는다. 페루의 리마에서 태평양을 보았지만 이후에는 산악지역만을 다녀서 오늘 이 항구도시의 바다 내음이 반갑다. 산티아고도 그렇고 발파라이소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칠레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진다. 유난히 푸른 하늘, 날씨도 좋다.



스페인 침략 당시 수도인 산티아고의 무역항으로 개발된 곳이 발파라이소다. 스페인풍 건물들이 즐비한 도심은 바다를 끼고 돈다. 게다가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여행자들의 발길을 끈다.

그저 “돈데에스따(Donde Esta : Where is)”만 남발하는 스페인어 실력으로 사람들에게 물어서 꼴렉티보(Colectivo)라는 택시 정류장을 알아낸다. 남미에서 꼴렉티보는 원래 버스를 의미하는 걸로 알았는데 이곳에서는 캡에 번호가 있는 공용택시를 말한다. 시내버스처럼 번호를 보고 노선을 미리 알고 탄다. 해안과 아주 가까운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덕이기 때문에 택시 꼴렉티보가 많은 것 같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집은 여기 발파라이소, 산티아고(Santiago)와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세 곳에 있다. 꼴렉티보를 타고 찾아가는 곳은 두 번째 집인 라세바스띠아나(La Sebastina)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그 작품을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Il Postino)를 좋아한다. 남미문학이나 영화를 다양하게 접할 기회는 없었어도 네루다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며 외교관이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을 도왔고 아옌데가 암살당한 후 지병으로 사망한다. ‘네루다’라는 이름은 17년간의 독재정권이 끝나기까지 칠레 민중들에게는 저항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전 세계가 인정한 위대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에 전율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후략)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 시가 내게로 왔어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다. 김용택 시인이 좋아한다는 한국의 명시들이 망라되어있는 이 시집에, 유일한 외국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실려 있다. 정현종 시인이 옮긴 “시가 내게로 왔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만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역만리 발파라이소에 와서는 그의 삶의 자취를 보고 있으니 감개무량이다. 



네루다의 집에서 바라 본 풍경은 황홀하다. 역사지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아름다운 발파라이소의 전경과 푸른 태평양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집 구석구석이 세상과 삶을 사랑한 그의 인생을 말하고 있었다. 네루다의 집은 ‘집’이 그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지나간 삶의 흔적이, 관람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를 던진다. 멋지고 감동적이다.



살아가는 공간이 바로 삶의 일부임을 생각하며 네루다의 집을 나선다. 위인이 수집한 멋진 소품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사랑한 시와 예술, 사람과 세상, 삶과 바다까지 그 모든 것이 감동적이다. 길 위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새삼 그리움을 부른다. 일상이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 하루하루가 그 삶의 기록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이곳에서 새삼 떠올리게 된다.



언덕 위 네루다의 집에서 신시가 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 알록달록 끝없는 그래피티의 향연을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시원하게 바다가 펼쳐진다. 돌아선 골목마다, 개개의 담장마다 개성이 넘치는 그림들이 있다. 40여개의 언덕에 개성 있는 그림이 그려진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도시 전체가 이런 식으로 보존되고 있어 가히 세계문화유산이다. 하나하나 구경하며 내려가다 보니 내리막인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쁘랏부두(Muelle Prat)까지 걸어 내려온다. 산티아고의 외항답게 크루즈 선박과 작은 배들, 군함도 떠 있다. 역사지구 언덕에서의 고요함은 사라지고 항구에는 활기가 넘친다.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5시 버스표를 미리 사놓았기에 버스터미널로 간다. 쁘랏부두에서 시외버스터미널은 방향이 정반대라 택시를 탈까 하다가 재미로 버스를 타보기로 한다. 행인에게 물어 버스정류장까지 오긴 했는데 이젠 또 노선을 모른다. 버스표 판매소에서 표를 사며 물으니, 말이 안통해서 답답한지 판매원 아주머니가 부스에서 나오더니 아예 버스에 태워준다.



주위사람들에게 하차할 정류장을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하니 고개를 끄덕여 준다. 이래저래 칠레인들의 친절함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빨리 내리라는 손짓을 한다. 엉겁결에 내린 곳은 터미널에서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시끌벅적한 시내다. 아까 쁘랏부두의 버스정류장에서 터미널로 직접 가는 버스가 없었던 모양이다. 말이 안통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 줄 수 없으니 버스를 직접 태워준 것이었다.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차라리 택시를 탈 걸 후회가 밀려온다. 그렇다고 예매한 버스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기는 싫으니 열심히 뛴다. 동양인 셋이 달리기 시합하듯이 뛰니까 영문 모르는 행인들은 궁금해서 힐끔거린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본 것은 고등학교 체육시간 빼고 처음 아닐까 싶다.

다행히도 출발 5분전, 땀이 흥건하게 젖은 채로 간신히 산티아고 행 버스에 오른다. 하루라도 길을 잃지 않으면 여행이 아닌 걸까? 어이가 없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