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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 청부살해ㆍ밀고까지도 … 동서양 막론하는 ‘가족간 경영권 분쟁’
[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홍승완ㆍ성연진ㆍ김현일 기자] 롯데가의 후계 다툼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 부회장은 30일 보도된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와의 인터뷰에서 “일관되게 그 사람(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을 추방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 밤 미소를 띈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동생 신동빈 회장에게 반격할 자신감이 있음을 피력했다. 롯데가의 싸움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막대한 재산을 두고 가족ㆍ형제간에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보통 사람들에게 달갑게 보일리가 없다. 하지만 재벌가 경영권 분쟁의 원인에는 비단 돈 만 있는게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차이가 형제간 부녀간의 경영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계 구도를 둘러싼 부호들의 다툼은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돈이 있고, 거대 조직에 대한 통제권이 있는 자리라면 어디에서건 싸움이 생기기 쉽다. ‘피보다 돈’이 앞선 부호 형제들의 갈등을 짚어봤다.

(왼쪽부터) 마우리치오 구치와 알도 구치, 마우라치오의 전 부인 패트리시아

#1. 청부살해까지 이어진 드라마같은 구치(Gucci)가의 비극


1995년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치가의 3세 마우리치오는 청부살해업자에게 총으로 살해 당해 충격을 줬다. 그의 살해를 의뢰한 이는 이혼한 전 부인. 살해 이유는 마우리치오가 구치가 2,3세대의 경영권 다툼 과정에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구치는 구치오 구치(Guccio Gucci)가 1921년 피렌체에 최고급 가죽 공방을 세우며 탄생했다. 1953년 그는 많은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는 딸 하나, 아들 셋이 있었는데 딸에게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세 아들에겐 지분을 3분의 1씩 공평하게 나눴지만, 곧 둘째 아들의 사망으로 장남 알도와 삼남 루돌프가 지분 50%씩을 갖게 됐다.

마우리치오는 삼남 루돌프의 아들이었다. 그의 큰 아버지 알도는 창업 초기 회사를 키운 자신이 동생과 지반을 반씩 나눠 가진 것이 불만이었다. 불만을 가진 이는 알도 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파울로는 기 센 아버지 밑에서 독립을 호시탐탐 노렸다. 아버지 등을 치기로 한 파울로는 사촌 마우리치오와 합세해 1986년 미국에서 아버지 알도의 탈세를 고발했다. 이 동맹은 곧 깨졌다. 파울로는 아버지에 이어 사촌 마우리치오마저 구치가에서 내몰고자, 그 역시 세무당국에 다시 고발했다.

소송으로 개인재정에 압박을 느낀 마우리치오에게 손을 내민 것은 큰 아버지 알도였다. 파울로에게 배신감을 느낀 둘은 손잡아마우리치오에게 지분을 몰았다. 그러나 마우리치오는 결국 1993년 재정 문제로 모든 지분을 매각하면서 구치의 경영권을 넘겼고, 이에 격분한 전처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다슬러 운동화의 두 아들 루돌프 다슬러(왼쪽)와 아돌프 다슬러. 갈라선 형제는 푸마와 아디다스를 창업했다.

#2. “형을 잡아가라”…나치 활동까지 밀고했던 아디다스와 푸마 형제

독일 신발 공장에서 일하던 크리스토퍼 다슬러에게는 루돌프와 아돌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애칭은 ‘루디’와 ‘아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두 아들 가운데 아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엌에서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4년엔 루디도 동생의 사업에 동참했다. 상호는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 사업은 번창했다.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당시 아디는 형과 함께 만든 스파이크가 달린 운동화를 담아 올림픽 선수촌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아디는 미국 단거리 육상선수인 제시 오언스를 설득해 자신의 신발을 신고 올림픽에 출전했고, 오언스가 금메달을 네 개나 따냈다.

이 것은 흑인에 대한 최초의 상업적 후원일 뿐 아니라, 육상 최초의 올림픽 4관왕이었다.

다슬러 운동화는 유명해졌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1943년 연합군이 독일 폭격 당시 루디와 그의 가족이 방공호에 대피해있었는데, 얼마 후 아디부부도 그 곳으로 피신했다. 아디는 들어오면서 “비열한 자식이 여기 들어올거야”라고 말했다. 루디는 비열한 자식이 연합군이 아니라 자신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얼마 뒤에는 루디가 나치 친위대로 활동한 사실을 아디가 밀고해 형이 미군에 붙잡혔다. 둘은 1947년 완전히 갈라섰다.

루디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1948년 ‘푸마’로 이름을 바꿨다. 아디는 1949년 ‘아디다스’를 세웠다.

갈라진 뒤, 두 회사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둘은 이후 다시 말을 섞지 않았다. 두 회사가 집안 다툼에서 벗어나 스포츠 업계 경쟁자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두 형제가 죽고 한참 후인 2009년이었다. 양사는 그 해 9월 21일 우호적인 협력을 상징하는 의미로 본사 직원들이 함께 축구 경기를 하고 이 날을 ‘피스 원 데이’로 명명했다. 무려 60년 만이었다.

인도 릴라이언스 그룹의 두 형제 형 무케시 암바니(위)와 동생 아닐 암바니.

#3. 동생과 ‘쩐의 전쟁’ 인도 1위 부자 무케시 암바니


2007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누르고 자산가치 632억 달러로 세계 1위 부호 자리에 올랐던 무케시 암바니 인도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 그는 2002년 아버지이자 창업자인 디루바이 암바니 회장 사망 후, 동생 아닐과 전쟁을 시작한 바 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지 않고 숨지자, 상속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당시 형제의 싸움을 중재한 것은 어머니었다.

2005년 어머니는 형이 섬유, 화학, 정유를 동생이 나머지 계열사를 맡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됐다.

2008년에는 아닐이 아프리카 최대 이동통신사인 MTN 인수합병을 추진하자, 무케시가 제지에 나서 무산시켰다.

이들의 3차전은 천연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생은 기업 분할 당시 양해 각서를 근거로 가스 공급 계약에 대한 주장을 했으나, 대법원은 형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양해각서에는 무케시가 1mmbtu(100만 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당 2.34 달러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야한다고 명기돼있었다.

현재 무케시의 자산은 221억 달러, 인도 1위 부호다. 그러나 이는 한 때 지구상 가장 부유한 이였던 때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2008년 420억 달러이던 동생 아닐 역시 현재 자산 63억 달러로 크게 줄었다.

오츠카 카츠히사 회장(왼쪽)과 딸 쿠미코 사장.

#4. “우리 아버진 나쁜 경영자” 기자회견도 … 경영방식 놓고 벌인 日 부녀전쟁

지난 2월 일본 제계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일본을 대표하는 가구회사인 오츠카 가구의 창립자인 오츠카 카츠히사와 그의 큰 딸 쿠미코 간의 분쟁이다. 상속을 두고 형제간 경영권 다툼을 벌이거나 하는 일은 일본에서도 종종 있지만, 물려준 아버지와 물려받은 딸이 분쟁을 일으킨 경우는 흔치 않다.

오츠카 가구는 1969년에 설립돼 현재는 일본 전역에 대형 쇼룸을 여러 개 운영하는 큰 기업이다. 창립자인 카츠히사 회장은 지난 2009년 쿠미코에게 경영자의 자리를 물려줬다. 온라인 판매와 이케아 등의 대형 외국 브랜드의 등장으로 주춤하고 있는 오츠카 가구에 딸의 섬세하고 젊은 감각을 더해 살려보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의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갔다. 아버지가 수십년 해온 영업 방식을 일거에 없애 버렸다. 그때까지 오츠카 가구는 일본 가구점으로는 드물게 멤버십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오츠카 가구를 방문하는 모든 고객은 고객카드를 작성한 후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만 구경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직원이 여러가지 다양한 가구를 권유하면서 매출 신장으로 이어졌다.

반면 쿠미코는 최근 소비자들은 간섭 받기를 싫어한다며 이를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전략으로 여겼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경영방식을 모조리 뒤엎었다.

이에 오츠카 회장은 크게 분노했다. 딸의 노력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 다시 이사회를 소집해 지난해 7월 딸을 사장직에서 해임하고 이사로 강등시켰다. 그 과정에서 딸의 모든 경영 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쿠미코를 지지하던 경영진도 대폭 물갈이됐다. 하지만 아버지가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선 뒤에도 회사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오츠카 가구는 지난해 매출 555억엔에 4억200만엔 이라는 영업적자를 냈다.

그러자 이사회는 다시 쿠미코에게 러브콜을 보내 1월 28일부로 그녀를 다시 사장직에 앉혔다. 하지만 아버지 오츠카 회장은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며 기자회견까지 열어 쿠미코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쿠미코 사장은 3개년 경영 정상화 방안을 내놨다. 오츠카 가구의 핵심전략이었던 멤버십제도의 폐지 등 여러가지가 포함돼 있다. 또 비용을 절감하고 기업고객을 늘리고, 가격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중저가 가구를 도입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야말로 경영을 잘 모르고 있으며, (회사 실적이 부진한)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주주총회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지분은 아버지가 많았지만, 딸의 혁신안에 마음이 동한 미국계 투자펀드가 쿠미코의 편에 섰다.

한달 후 주주총회가 벌어졌다. 결과는 딸의 승리 200여명 주주들의 약 3분의 2이상이 쿠미코가 선정한 새로운 이사회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녀는 오츠카 가구의 대표로 남게 됐다. 아버지는 회사 경영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손을 때고 물러났다.

yjsu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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