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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민낯]사치풍조 만연…근절위해 가체금지령 내린 영조
한국고전번역원과 함께 읽는 승정원일기<18>
사치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726년(영조 2) 10월 17일에 부제학(副提學) 이기진(李箕鎭)이 사치의 폐해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상소(上疏)는 현직이나 전직 관원, 또는 유생(儒生)이 임금에게 아뢸 일이 있을 때 올리던 문서이다.



삼가 아룁니다.

선현이 말하기를, “사치의 폐해는 수해와 가뭄보다 심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치가 심하면 그 해의 곡식이 풍년이 들더라도 백성들은 여전히 배고픔을 면치 못함을 말한 것입니다. 하물며 요즘처럼 수해와 가뭄이 계속되는데 거기에다 극도로 사치하는 풍속까지 더해진다면, 백성들이 굶주려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농촌에 오래 살아 농민의 생리를 그런대로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길쌈하며 일년 내내 일하면서도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그저 한 사람이 한 해 살아갈 밑천으로, 먹는 것은 곡식 두 포, 입는 것은 베 한 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관청에 바치고 빚을 갚기에도 부족하여 끝내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고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합니다. 도시의 여염에서 부자나 권세가가 낭비하는 것을 보면, 한 상 차림이나 옷 한 벌 값이 수십, 수백 농가의 재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비용이 나온 곳을 살펴보면 모두 농민이 힘써 경작한 것에서 빼앗아 온 것이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이기진은 “궁중에서 상투 높이기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한 자를 높인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세속에서 궁실의 친인척을 모방하는 것이 사치의 원인이 되니, 위에서 모범을 보이면 아래에서는 자연히 사치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상소를 받은 영조는 유의하겠노라고 비답을 내린다. 그러나 이후로도 사치하는 습속은 없어지지 않아 사대부가의 아녀자들이 머리에 높이 가체(加)를 얹고 13~14폭이나 되는 치마에 금박을 입혀 입기도 하였다. 결국 1756년(영조 32)에는 가체를 쓰는 것을 금하고 족두리로 대체하라는 가체 금지령이 내리기까지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하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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