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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력지상주의, 높은 부모 기대…‘리플리’ 낳는 사회
[헤럴드경제=박혜림 기자]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와 스탠포드 대를 동시에 입학했다며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인 수학 천재 소녀’의 실체가 ‘거짓’으로 드러나며 한국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사기극’의 중심에 선 김모(18) 양이 하버드 대 합격증 위조는 물론 여러 언론 인터뷰에 태연하게 응하는 등 평범한 여학생이 하기엔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 양의 이같은 행동이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의 유형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력 지상주의 등이 제 2, 제3의 김 양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잖다.
사진:게티이미지


리플리 증후군이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이를 부정하면서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나아가 거짓을 진실이라고까지 믿는 현상이다.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 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을 때 주로 발생한다.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은 이를 반사회성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 등 성격장애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김 양처럼 리플리 증후군으로 의심되는 사례는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벌어진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동국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신 씨는 미 명문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 등을 받은 것처럼 속여 미술계는 물론 청와대까지 발을 넓히며 젊은 나이에 광주비엔날레 공동감독으로까지 발탁됐지만, 학력 위조가 들통나며 논란에 휩싸였다.

김병수 아산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 따르면 의식적 또는 공상적인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허언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사소한 거짓말을 내뱉은 뒤 여러가지 상황이나 관계 등으로 인해 이를 들키지 않고자 거짓말을 반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대학생 A 씨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4수생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내신 성적이 하락하자 부모님의 꾸중이 두려워 이를 조작한 게 화근이었다. 

이후 수능에서 실제 성적이 나왔지만 부모님은 A 씨가 ‘실수’를 해 성적이 미끄러진 것이라 여겼고, 결국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A 씨는 4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리플리 증후군은 극단에 치달을 경우 한 개인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과 교수는 “거짓말에는 분명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한 기술이라는 순기능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황에 대한 거짓말”이라면서, “학력 등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거짓말은 자칫 존재 자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삼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극단적으로 자아가 붕괴돼,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리플리 증후군 자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리플리 증후군을 양산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학력지상주의, 성과지상주의 등이 제2의 김 양, 신 씨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김 양도 지나친 성과위주 사회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며 “실제 어떤 집단에 ‘일등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이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허용하면, 집단에 속한 사람 대부분이 속임수를 사용하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 어느 대학까진 갈 수 있다’는 부모의 기대도 성과 지상주의의 한 맥락이다. 성과가 곧 특별함을 나타내는 상황에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무리한 일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것을 걸러내는 1차적 수단은 학벌”이라면서 “사람마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제각각인데도 명문대 졸업장만으로 능력을 검증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임 교수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구조를 천편일률적인 방향이 아니라 여러가지 기준을 세워 다방면에서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구조로 개편해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학벌이 가져오는 막연한 부대효과 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r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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